FRB, '완만한 출구(slow exit)' 선택했다

머니투데이 엄성원 기자 2009.06.2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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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유동성 지원 축소, 상시 체제로 전환 의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완만한 출구(slow exit)'를 향한 첫발을 내딛었다.

벤 버냉키 연방 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25일(현지시간)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추진했던 시장 유동성 지원책 중 일부를 중단 또는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FRB의 유동성 정책이 '공격적 완화'에서 '현상 유지' 또는 '소극적 억제'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동성 공급 축소는 또 FRB의 초점이 위기 극복에서 위기 탈출 이후 정책 변화에 따른 시장 충격 최소화 등 출구 전략으로 차츰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상시 통화정책으로의 전환

FRB는 이날 신용시장 상황 개선에 따라 유동성 지원책 중 1개 대책을 중단하고 기간물 국채 임대 대출창구(TSLF)와 기간 입찰 대출창구(TAF) 등 2개 대책의 운용 규모를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FRB의 유동성 지원 축소 의지는 이미 전일 연방 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FRB는 FOMC 성명에서 "최근 몇 개월간 금융시장의 제반 상황도 개선됐다"며 그동안 강력히 추진해 온 금융시장 구제안이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FOMC 성명이나 이날 발표에서 직접 출구 전략(Exit Strategy)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FRB의 정책 시선은 위기 탈출 이후로 움직이고 있다. 이날의 긴급 유동성 지원 축소나 전일의 디플레이션 경고 철회 등은 금리 인상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분위기 조성 단계로 볼 수 있다.


◇ 최대한 천천히

FRB는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FRB가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 한 FRB의 금리 인상 결정은 그간의 비상 정책이 모두 철회된 뒤 이뤄질 공산이 크다.



이날 중단이 발표된 유동성 지원책은 머니마켓 투자펀드기금(MMIFF)으로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이용된 적이 없다.

TSLF와 TAF의 운용 규모는 기존의 6000억달러(옵션 제외)에서 5000억달러로, 2000억달러에서 750억달러로 각각 축소됐다. FRB는 또 상황 변화에 따라 TSLF를 추가 축소할 방침이다.

FRB는 하지만 TSLF와 TAF의 운용 기한은 내년 2월1일까지 3개월 연장했다. 상시 정책으로의 전환이 최대한 완만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서다. 연장 결정에는 시장 안정이 아직 완전치 않다는 FRB의 현실 판단도 담겨 있다.



프라이머리 딜러 대출창구(PDCF)와 자산담보부 기업어음 머니마켓펀드 유동성대출 창구(AMLF), 기업어음 자금대출 창구(CPFF) 등의 운용 시한도 마찬가지로 내년 2월1일까지 3개월 연장됐다.

외국 중앙은행들에게 달러를 공급하기 위해 2007년 12월 시작된 통화스와프 계약의 시한 역시 내년 2월1일까지 3개월 연장된다.

미국은 현재 한국을 비롯, 일본, 호주, 영국, 유로존, 캐나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브라질, 멕시코,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과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 버냉키 연임 연부도 감안

FRB의 조심스런 행보에는 버냉키 의장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버냉키 의장의 임기는 내년 초 끝나지만 아직 연임에 대한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FRB가 공격적인 전략을 선택하기에는 너무나도 민감한 시기다.



시장은 버냉키 의장을 사상 최악의 상황에서 금융권을 구해낸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치권은 그렇지 않다.

지지자들은 버냉키 의장을 과감한 통화정책을 채택, 최악의 위기를 극복해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잭 웰치 전 GE 최고경영자(CEO)는 버냉키 의장을 '국가적 영웅'으로, 뱅가드의 켄 볼퍼트 CEO는 '위대한 의장'으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셔웨이 회장도 버냉키 지지의사를 밝혔다.

반면 정치권 등 반대자들은 버냉키 의장이 FRB의 힘을 남용한 결과가 위기 탈출 이후 값비싼 대가로 돌아올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이날 하원 정부 개혁 감사위원회에 출석,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메릴린치 인수와 관련, 여야 의원들로부터 FRB가 필요 이상으로 간섭했다는 지적에 시달렸다. 또 FRB에 추후 위기 대응을 위한 추가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비판도 감내해야 했다.

버냉키 의장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 의해 지명됐다. 하지만 최근 공화당이 오히려 버냉키 의장을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나 민주당이 버냉키 의장을 적극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임무를 잘 수행했다며 버냉키 의장을 띄워주기는 했지만 연임 문제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이 때문에 버냉키 의장이 연임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잇따르고 있다. 버냉키 의장이 연임에 실패할 경우, FRB의 정책 신뢰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연임에 실패할 경우, 로렌스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이 차기 FRB 의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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