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잘리기 전에 병원 가 둬야…"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9.04.15 15:10
글자크기

[김준형의 뉴욕리포트]

얼마전 주말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 학부모 집에서 조촐한 바베큐 파티를 가졌다. 세상 걱정없어 보이는 전형적인 미국 백인 중산층 가장들이지만 맥주 한잔을 곁들이니 경제위기를 살아가는 나름대로의 사연들을 털어놓았다.

그중 관절 전문 클리닉에서 행정일을 하는 한 학부형은 요즘 경기가 안좋아 힘들겠다고 물었더니 "월급은 줄었는데 오히려 환자는 너무 많아져 힘들다"고 불평했다.
평소 같으면 '나중에 고치지' 하고 넘어갈 증상들도 혹시 직장에서 잘릴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병원부터 찾는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부담하는 의료보험이 사라지면 제 돈으로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달여 전 아이가 감기끝에 코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갔다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진료비 청구서가 어제 배달됐다. 10여분 간의 의사 상담비가 200달러, 콧속 한번 들여다 본 내시경 비용이 250달러, 약값 빼고도 우리돈으로 감기 한번에 60만원이었다.

이중 본인부담 진료비 90달러도 적지 않은 돈이지만, 보험사에 청구한 나머지 돈은 더 터무니 없다. 파생상품 손실이 없었어도 AIG같은 보험그룹의 위기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는 두 아이 학교 제출용으로 간단한 육안 검진서를 떼는데 각각 100달러씩을 냈다. 나중에 알고보니 병원에서 보험사에 따로 600달러를 청구했다. "행정착오였다"는 답을 병원으로부터 듣긴 했지만 이런 비용까지 벌충해야 하니 보험사들은 보험료를 더 올려받을수 밖에 없다.
커버 영역이 넓은 보험을 들려면 한 가족이 월 1000달러 이상 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도 기본적인 보험으로 버티며 어지간한 증세는 참고 산다. 아예 의료 보험 없이 사는 미국 사람이 5000만명이나 되는 것도 당연하다.
반면 고가의 보험 가입자들은 낸 돈이 아까워 틈만 나면 이른바 '의료 쇼핑'에 나선다.

GM같은 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직시나 퇴직후 의료보험 제공 문제가 최대 이슈가 되고, 보험비용이 회사를 뒤흔들 정도가 된 것은 기형화된 의료보험 체계의 한 단면이다.

그래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중 숙원사업은 '환경'도 '평등'도 아니고 전국민 의료보험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자리잡은 터라 천하의 오바마도 쉽지 않아 보인다.


'민영의보 확대' 혹은 '의보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미국식 재앙을 이식하려 했던 한국의 시도가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민간의보는 국민건강보험을 보완하는 것이라는 명분은 원칙상으로야 맡는 이야기다.
하지만 높은 의료 수가를 청구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소비자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민간의보가 공공의보를 구축하는게 시장논리의 현실이다. 정부가 재정적자 축소를 지상 목적으로 내걸고 추진한다면 민영의보의 공공의보 대체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사람은 아파도 보살핌을 받지 못할때 가장 서럽고 분노하게 된다.
실업자 되기 전에 병원에 가둬야겠다는 미국인들은 의료가 '시장'의 영역이 아니고 '사회안전망'의 차원이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나마 우리 사회 각 거의 전 부문을 지배했던 신자유주의 시장논리, 민영화 지상주의에 제동이 걸리는 듯한 모습은 미국발 글로벌 침체가 가져다준 선물일지 모르겠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