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준비된 기회, 희망을 말한다

머니투데이 윤석민 국제경제부 부장 2009.02.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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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 코미디 토크쇼 진행자인 데이비드 레터맨이 현대차를 비꼰 적이 있다. 지독한 독설가인 그는 자신의 토크쇼에서 고장이 잦고 덜컹거리는 러시아 미르우주정거장이 꼭 현대차같다고 비유했다.

한창 외환위기가 깊어지던 1998년 3월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재정난에 처한 러시아의 우주정거장 미르는 부품도 교체 못해 고철 덩어리와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우주인이 갇혀 '우주 미아'가 되는 사고도 종종 발생하곤 했다.



TV에서 '현다이'라는 발음을 듣는 순간 뱃속의 밥알은 곤두섰지만 뭐 굳이 틀린 얘기는 아니다 싶었다. 당시 미국내에서 현대차의 평가는 한마디로 '싼게 비지떡' 이었다. 내구성은 물론 안전도도 뒤쳐져 발음을 본따 '영 다이(young die)'라 불리기도 했다.
중고차 가격도 똥값과 다름없어 일부 애국심에 불타는 동포나 미국 저소득층이 주구매층을 이루던 시기이다. 이로인해 그저 레터맨의 '개그는 개그일뿐'으로 넘기고 말자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얼마 안돼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방송을 본 미국의 한 현대차 딜러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당시 썼던 기사를 인용하면, 몬태나주 미줄라에서 현대자동차 딜러를 하는 코너 라이언씨는 분에 못이겨 레터맨에게 당장 이메일을 보냈다. "데이브, 현대차를 타보기나 했니"로 시작된 그의 항의 메일은 현대차가 미르보다 좋은 10가지 이유도 적어놓았다. 그러나 레터맨측은 묵묵부답이었다.



라이언씨는 현대 티뷰론을 직접 몰고 '레터맨쇼' 녹화장인 맨해튼 CBS본사를 찾아나서는 항의 방문길에 올랐다. 말이 쉽지 북서부 몬태나에서 동쪽 끝 뉴욕까지는 장장 4,120㎞ 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콜로라도 산맥을 넘고 대평원을 가로질러야하는 모험의 길이다.
'데이브, 두고보자'라고 쓰인 스티커로 뒤덮인 은빛 티뷰론을 타고 그냥 달리기만 한 것도 아니다. 장정 중간 중간 현대차 구매고객들도 만나고 자신의 주행모습을 '현대'비디오캠에 담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장도에 오른지 6일만에 맨해튼 CBS본사앞에 도착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레터맨을 태우고 뉴욕시내에서 시승하는 것이다. 타보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타고난 세일즈맨 라이언씨의 생각이었다. 레터맨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의거'는 CNN 등 미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로부터 1년반정도 지나 99년 7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외아들인 존 주니어 케네디가 비행기를 몰던중 추락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온 미국민의 애도 가운데 연일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던 그의 사망 소식중 유독 눈길을 끈 한 장면이 있었다.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비행장 주차장 한 구석에 남겨진 그의 자동차 사진이다. 눈에 익은 그 모습은 검정색 티뷰론이었다. 촉망받는 변호사이자 수억대 유산상속자이던 미국 '아이돌'의 애마가 현대차라니...


다시 10년이 흘러 2009년. 현대차가 럭셔리 브랜드 이미지업을 위해 출시한 제네시스가 '올해 북미의 차'로 선정됐다. 또 미국민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미식프로축구 챔피언십 슈퍼볼에는 현대차가 메인 스폰서로 참여했다. 미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1위를 뽐내던 제너럴모터스(GM)의 자리를 현대차가 대신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힘든 시기에 광고를 낸 현대차의 자신감에 대해 분석 기사를 내면서 이 광고가 미국민에게 잘못된 발음인 '현다이'를 '현대'로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한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부양법 통과를 호소하며 "이번 위기를 업계 재편의 기회로 삼지 못하면 한국과 일본 자동차와 경쟁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0여년전 레터맨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준비된 기회일 수 있다는 희망도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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