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미국식 감원'이 사회안전망 무너뜨려

머니투데이 이규창 기자 2009.02.0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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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생존위기…사회갈등 우려

일본 경제가 자신들의 모델이던 '평생직장'제를 버리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도입한 이후 최악의 실업 공포를 맞고 있다. 경제위기의 해결책으로 기업들이 선택한 미국식 대량해고는 일본의 사회안전망을 무너뜨리면서 숫자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7일(현지시간) 실업에 대한 사회보장제가 아직 갖춰지지 않은 일본의 대량해고는 미국보다 더 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10월 이후 기업들이 발표한 감원 규모는 13만1000명 가량이다. 미국은 11월부터 3개월 동안 비농업부문에서만 177만명의 고용이 줄었다. 2배 가량 차이나는 인구수를 감안해도 일본의 감원규모는 미국에 비해 아주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가 실제로 체감하는 실업공포는 미국에 못지 않다. 특히 비정규직의 실업 문제는 고용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근 10년간 '미국식 비정규직화'를 받아들여왔던 일본에게는 처음 접해보는 '사회안전망 붕괴' 위기다.

◇평생직장 소멸…대기업 중심 사회안전망 '흔들'
한국의 개발모델이었던 대기업의 선단식 경영이 뿌리깊이 자리해온 일본은 대기업들의 잇따른 감원이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10년 불황'에도 종신고용 원칙을 고수했던 캐논마저 감원에 나서면서 사실상 안전한 직장은 사라졌다.



당장 캐논의 오이타 공장 직원들은 단순한 실직 이상의 타격을 받고있다.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히라노 코지(47)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오이타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그는 지난 10월말 공장 앞 카페에서 인사담당자를 만나 해고 통지를 받았다.

히라노씨는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와 함께 직원용 아파트에서 나가달라는 요구를 받아다. 월 700달러 가량을 벌면서 저축은 거의 하지 못했던 히라노씨를 비롯해 수천명의 직원들은 추운 겨울에 길바닥으로 내쫓기게 됐다.

히라노씨의 사례는 현재 일본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겪고있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10월이후 감원된 13만1000명중 대부분인 12만5000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이들은 샐러리맨이라 불리는 일반 근로자들이나 중소기업 공장 근로자들보다도 지위가 취약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량해고' 사태 경험이 없는 일본이 비정규직 근로자의 실업과 복지 관련 대책을 제대로 마련해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는 "해고 근로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무력하다"면서 "비정규직 근로자는 더 낮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감수하고 단기 고용계약을 맺으며, 해고를 당해도 법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일본은 대기업 중심 경제성장을 추진하면서 대기업이 중심이 되는 사회복지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감원을 하지 않고 근로자들의 은퇴 이후까지 기업이 연금과 복지를 책임지는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사회안전망은 부족하다.



◇'비정규직' 사회갈등 고조…방관했던 정부도 '대책부재'
아소 다로 총리가 캐논 오이타 공장 해고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중재에 나서면서 이들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직원용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시기를 몇 달 늦출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비정규직 근로자는 이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다.

지난 신년 연휴동안 후생노동성 인근 도쿄공원에서는 직장에서 해고돼 집조차 잃게 된 500명여명의 전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텐트를 치고 노숙촌을 만들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온건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서 경제침체로 집을 잃게 되는 사태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10년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미국화'하는 과정에서 사회안전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다.



도쿄대학의 노사관계 전문가인 아베 마사히로 교수는 "이번 경제침체가 전통적인 사회안전망 밖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 사회 불평등 문제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10년전 일본의 전체 근로자에서 비정규직 비중은 4분의 1에 못 미쳤다. 그러나 기업들이 기존 정규직 업무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할 수 있게 1999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노동법을 개정한 이후, 경제활황기에조차 정규직 숫자는 줄고 비정규직 근로자만 수백만명 늘었다.

내각부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전체 근로자중 34.5%가 비정규직이며 그 숫자는 5530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제한적이나마 정부로부터 실업과 복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1년 이상 같은 직장을 다녀야하지만 쉽지 않다.



후생노동성의 이노우에 유스케는 "일본의 사회안전망은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는데 실패했다"면서 "기업에 대한 규제가 사라진 고용시장에 맞는 새로운 사회안전망 구축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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