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지난 4일 서울 삼청동에 소재한 와인 레스토랑, 두가헌에서 만난 신용일 사장은 "와인에 푹 빠진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랑팔레(Grand Palais, 독일 슈피겔라우사의 와인잔)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렇게 답했다. 소년이 첫사랑을 고백하듯 조심조심.
낮 설고 외로운 타지생활 때문이었을까. 당시 30세였던 그는 와인과의 연애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는 "와인을 통해 보다 쉽게 타국의 문화와 사람과 소통할 수 있었다. 나에게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를 잇는 매개체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와인과의 연애도 오래가지 못했다. 5년간 영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이후 와인은 옛 추억으로 조금씩 멀어져 갔다.
"한국에 돌아오니 와인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당시만 해도 와인은 대중적이지 않았고, 일반인에겐 값비싼 사치품에 가까웠으니까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죠."
이 시각 인기 뉴스
그랬던 그가 와인과 다시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 것은 도이치자산운용의 CEO가 된 2003년부터다. 도이치뱅크그룹은 매년 전 세계 VVIP들을 대상으로 도이치뱅크 행사를 개최하는데 그 행사가 다름 아닌 와인 시음회. 그에게 세계 각국의 명품 와인을 무료로 시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와인 애호가 단계를 넘어 마니아가 됐다.
또 다시 와인에 푹 빠진 그는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와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꼭 수집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투자가 직업인 자산운용사 CEO인 만큼 상당수는 투자차원에서 사들였다.
"와인 시음회 행사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매년 그 행사비용이 증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숫자의 같은 와인으로 행사를 진행해도 매년 비용이 증가했죠. 시간이 경과할수록 수요대비 공급부족으로 와인의 가치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투자자산으로도 제격인 셈이죠."
에피소드 하나. 2005년 어느 날 그에게 앙프리뫼(En-Primeur, 병입이전 상태의 와인)를 싸게 대량 구매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와인업계에서 2005년산 와인은 지난 반세기 중 최고의 빈티지로 여겨진다. 그만큼 값도 비싸다. 2005년산 앙프리뫼가 와인 병에 담기는 순간 그 값어치는 1.5배 가까이 뛰는 것이 보통. 하지만 신 사장은 그 흔치 않은 기회를 '직업병' 때문에 날려 버렸다. 재테크는 분산투자가 최고라는 인식 때문에 대량 구매를 포기하고 말았던 것. 그는 "이미 지나간 기회지만 그 때만 생각하면 아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초보자들도 쉽게 와인의 깊고 오묘한 맛을 즐길 수 있을까. 신 사장은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이 있는 곳에서 와인을 즐길 것을 권했다. "무엇이든 즐거워야 오래가고 숙달되는 법이죠. 와인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지인들과 좋은 와인 레스토랑을 자주 찾는 것도 이 때문이죠. 추천할 만한 곳이요? 저는 여기 두가헌과 함께 삼청동의 르 쁘티 끄루, 남산의 라쿠치나, 청담동의 팔레 드 고몽, 미 피아체, 뚜또 베네 등을 자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