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이라면 하나 같은 마음이겠지만 'IMF의 신탁통치기간'은 기자 개인에게도 치 떨리는 기억이다. 97년 10월 기자는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뉴욕특파원 임지에 오른 길이다. 기내에서 다시 떠올리고 떠올렸던 것은 타임스스퀘어의 휘황한 불빛과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진 뮤지컬들의 리스트였다. 우선 '팬텀 오브 오페라'를 보고 다음엔 '미스 사이공', 아니야 오래됐지만 그래도 '켓츠'는 봐야지.. 그렇게 흥분과 기대에 젖어 목적지로 향했다. 닥쳐올 엄청난 재앙은 꿈도 못 꾼 채.
부임 인사차 방문한 뉴욕 현지 기관, 기업에서 귀동냥해 들었던 첫 단어는 잊혀지지 않는다. 끙, 모라토리엄이라니. 오라토리엄은 알아도 이게 대체 뭔 말인가. 내색도 못하고 서둘러 집에 돌아와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그러면서 위기는 시작됐다.
위기는 끝모를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더 약 오른 것은 뉴욕에서 느껴야 했던 상대적 박탈감이다. '신 경제'닷컴 열풍이 몰고온 호황으로 증시는 날로 치솟고 거리에는 갈수록 큰 차들로 넘쳐났다. 미국내 차 판매에서 힘세고 덩치 큰 스포츠유틸리티(SUV)가 승용차를 처음 앞지른 시점도 이때이다. 돈과 자만이 넘쳐나는 맨해튼 거리 곳곳에는 시가바도 늘어났다. 시가는 미국인들의 성취감을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반면 환율로 따져 5000원짜리 담배를 꽁초까지 빨아댔던 그 씁쓸함은 아직도 쓴 침을 입에 괴이게 한다.
탈(脫)IMF 해법을 구하기 위해 당시 만났던 월가의 전문가들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건드렸다. 국제 기준에 미흡한 회계와 규제,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 투명성 확보 등이 귀에 박히도록 듣던 단어들이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국제신용평가사및 외국금융기관의 코리언데스크들은 억장마저 무너뜨렸다. 대학을 갓 졸업한 교포 1.5~2세들이 대부분인 이들이 우리나라의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저승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니... 자괴감이 북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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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난 3월 국제경제부 데스크를 맡았다. 다시 들여다 본 미국사회는 이미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어이 베어스턴스가 문닫더니, 패니매-프레디맥, 리먼브러더스 파산, 7000억달러 구제금융법 등 위기의 소용돌이는 걷잡을 수없이 커지며 미국식 자본주의의 조종(弔鐘)이 울렸다는 극적 표현도 나왔다. 그 과정중 불거져 나온 월가의 온갖 부도덕성은 참 가관이다. 과거 누가 누구를 탓했는지 일면 통쾌함마저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발(發) 위기의 불길이 또 우리를 덮쳐 IMF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다니. 참 불공평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