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한국 IMF와 美 금융위기

머니투데이 정희경 금융부장 2008.10.0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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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97년 12월3일. 당시 대통령선거 막바지에 촌각을 다투며 유세를 벌이던 이회창(한나라당)·김대중(국민회의)·이인제(국민신당) 후보 3명은 '어처구니 없는' 요청을 받았다.

이날 새벽 서울에 도착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이들에게 보장각서를 받아야만 구제금융을 해줄 수 있다고 버틴 것이다. 청와대와 경제팀은 후보들에게 각서를 받기 위해 읍소를 마다하지 않았다.



IMF는 고금리, 한계기업 정리와 대량실업 등이 불가피한 구제금융 패키지를 대통령 당선자가 이행하지 않을 경우를 우려했다. 세 후보는 썩 내켜하지 않았으나 국가 부도는 피해야 한다는 명분에 양보해 '본인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협의된 대로 이행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각서에 서명했다. 후보별로 각서 수신인은 달랐다. '경제 국치일'로 불린 이날 IMF와 우리 정부의 힘겨운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됐다.

이로부터 11년 가까이 흐른 후 미국에서 아주 흡사한 장면이 연출됐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공화·민주당 대선후보인 존 매케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을 포함해 양당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구제금융법안(금융안정화법안) 지지를 간절히 호소한 것이다.



금융회사의 잇단 경영 파탄에 사상 최대인 70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이 법안이 속전속결로 처리되기를 기대하기는 애초 힘든 일이었다. 막대한 혈세를 들여 월스트리트 금융회사, 특히 금융귀족을 구제한다는 데 부정적인 여론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민주당)에게 한쪽 무릎을 끊고 애원도 했으나 허사였다. 이후 양당이 어렵사리 절충해 제출된 법안은 첫 관문인 하원에서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다. 워싱턴의 '반기'에 다우지수는 20년새 최대폭인 777포인트 급락하는 것으로 충격을 대변했다.

국내에서나 익숙한 것으로 알았던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판을 미국도 비켜가기 힘들게 됐다. 정치인들이 당장의 이익에 연연해 리스크를 너무 회피했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확산돼 정치권의 반란이 엄청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온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수정안 제출을 서두르고 있으나 임기말 레임덕 현상, 의회 지도력 부재까지 고려하면 법안 통과에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더구나 혈세 투입이 최대 쟁점이 됐던 만큼 자칫 이 대목의 수정이 이뤄지는 경우 금융시장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효과적인 법안이 만들어질지도 불투명하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금융산업 선진화 등을 위한 법령이 대거 기다리고 있다. 민감한 이슈도 적잖지만 우리의 선량들은 미국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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