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가능성 지켜보는 보람이 나이도 잊게 해"

머니위크 이정흔 기자 2008.10.03 11:00
글자크기

[머니위크]은퇴, 그 후의 삶/ 이찬구 하나기술 회장

"젊은이들 가능성 지켜보는 보람이 나이도 잊게 해"


아침 9시. 이찬구(73) 하나기술 회장이자가용을 끌고 경기도 안양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시간이다. 아침회의를 시작으로 회사 일과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곳에서 젊은 직원들과 식사를 하고 회의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이 회장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직원 20~30명의 조그만 회사. 정확히 말하자면 이 회장은 이 회사의 고문이다. 직함은 회장을 맡고 있지만 경영은 50대의 젊은 사장이 도맡아 하고 있다. 이 회장은 뒤에서 회사가 마음껏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경영이나 금융과 관련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이 회장은 “평생을 금융과 경영 업무에서 종사해왔기에 지금껏 쌓아온 경험을 유망한 젊은 경영인들을 위해 풀어놓는 것만큼 인생 늙으막에 보람된 일이 없다”며 함박 웃음을 짓는다. 그의 말마따나 “경제인으로서 마지막 사회봉사”인 셈이다.

◆경제 발전의 시대와 함께한 평생



인터뷰에 앞서 이 회장이 슬쩍 책 한권을 내민다. 이제는 표지마저 낡아버린 고서적 위에는 <국제금융론>이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박혀있다.

지금은 세월에 묻혀 부석거리는 책갈피가 노랗게 변해있지만 70~80년대만 해도 이 책은 경제학도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여다봤을 만한 필독서 중의 한권이다.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어 온 주역들 모두 이 책을 보고 국제금융관계를 공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행 과장으로 재직할 때 쓴 책입니다. 어려서부터 평생에 책 한권은 꼭 써야겠다는 소신이 있었는데 이왕이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책이어야 한다고 항상 다짐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제금융과 관련해서 경제학도들이 공부할 만한 책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책을 갖고 공부를 했습니다. 나 역시 이 책을 강의하기 위해 대학 강단에 선 것만도 여러번입니다. 그때 내 책을 보고 공부한 후배들이 나보다 더 크게 성장해 우리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합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살자!’ 그는 젊은 시절부터 늘 이 말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한국은행과 수출입은행에 근무하며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고,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남다른 각오가 뒷받침 된 덕분이었다.

그는 한국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수출입은행을 거쳐 2005년 한라그룹에서 은퇴를 맞을 때까지 무려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을 지켜봤다. 현장에서 부대끼며 굵직굵직한 사건도 여러 차례 겪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경제발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그는 ‘한국 경제발전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8.15 해방 후의 남북 분단과 전쟁 등은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 끔찍함과 참담함을 짐작도 못할 것입니다.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어려서부터 겪고 살아남으면서 키워온 우리 세대의 저항력과 끈기가 아마도 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개발과 발전 시대의 원천이었을 겁니다.”

이 회장은 겸손하게 말을 잇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주도하의 경제계발 계획 수립에도 직접 참여했을 만큼 그 시절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주역 중 한명이다. 지금이야 대기업은 물론 여기저기 경제연구기관들이 많이 설립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권위 있는 경제조사연구기관으로는 한국은행 조사부가 유일했다. 당시 조사부에서 근무하던 그는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1차 계획 때부터 자연스럽게 경제 정책과 관여하게 됐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달러화 표시 1인당 국민소득’을 산출해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수출입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활약은 남달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이사직에 오른 뒤 수은 영국은행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995년 수출입은행에서 은퇴를 맞은 그는 한라그룹에서 경영인으로 변신한다.



“한라그룹에서 경영인으로 업무를 시작한지 몇년 지나지 않아 IMF를 겪었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힘든 작업을 손수 맡아서 지휘했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생이 많았던 때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며 경영인으로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마지막 사회 봉사, 하나기술

2005년 한라그룹에서 두번째 은퇴를 맞은 그는 휴식 시간도 없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 레이저기기 전문업체인 하나기술의 회장직을 도맡게 된 것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늙은이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기준 만은 명확했습니다. 하나기술은 규모는 작지만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튼튼하고 전도유망한 회사입니다. 내가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현장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조금만 보태준다면 이 회사가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김도열 하나기술 사장과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회장직을 맡게 된 그의 역할은 단순한 조언에 그치지는 않는다. 수시로 회의를 통해 경영 방침을 의논하는가 하면 금융업계 중요 인사들과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회장이 직접 직원들의 금융, 경영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하나기술은 레이저라는 전문기술을 다루고 있는 업체인 만큼 직원들 역시 엔지니어들이 대부분입니다. 김도열 사장 역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라 경영인으로서는 순수한 면이 많습니다. 그 순수함이 하나기술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그로 인해 혹여나 모자랄 수 있는 부분을 내가 경험으로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젊은이들 가능성 지켜보는 보람이 나이도 잊게 해"
덕분에 이 회장은 최근 레이저 공부에 열심이다. 경영이야 패기 넘치는 젊은 사장이 운영한다 하더라도 회사에 도움 될 만한 정확한 조언을 위해서는 이 회장 또한 레이저에 대한 전문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법은 간단하다. 식사시간은 물론이고 젊은 직원들과 마주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레이저에 관해 물어보는 것이다. 일부러 화제를 레이저 전문기술로 유도하기도 한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에 최첨단 기술을 새롭게 배우려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이 회장은 “그래도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시대는 점차 ‘소형화, 정밀화’를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작은 입자들에 의해 세부적인 많은 부분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나노기술, 나노경제로 가면서 레이저 기술의 응용분야는 점차 확대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레이저입니다.”



전문 연구원 못지않은 그의 지식에 놀랄 따름이다. 그가 하나기술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올바른 자문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쉽게 짐작하고도 남을 듯하다. 무엇보다 젊은 직장동료와 함께 부대끼며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이 회장이 지금의 노년생활을 너무나 만족스럽게 보내고 즐기고 있는 큰 이유다. 김 사장만 하더라도 이 회장보다 20년 후배일뿐더러 직원 역시 20~30대의 젊은층이 대부분이지만 이 회장은 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

“이미 은퇴를 맞이한 노년기에 이곳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기술은 참 감사한 회사일 수밖에 없지요.”

젊은 사람들과 생활하다보니 삶의 활력도 절로 얻는 듯하다. 더 좋은 레이저 장비를 마련하겠다는 그들의 열정어린 시선에서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배우는 것 또한 많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고들 하지만 하나기술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젊은이들은 참 예의바르고 생각이 깊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발전을 위해 애쓰겠다는 열정이 대단해보입니다. 나 역시 노후를 집에서 편히 쉬면서 보냈다면 젊은이들의 이런 가능성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곳 젊은 동료들과의 교류가 항상 즐거운가 봅니다.”

이 회장은 “앞으로 얼마나 자신이 더 필요한 사람으로 이 회사에서 함께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가 되든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는 하나기술을 위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힘닿는 데까지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평생을 사회 발전을 위해 힘썼다는 보람과 함께 젊은이들에게서 얻는 열정과 활기는 덤이다. 그에게 은퇴는 없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