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은행장 내쫓는 건 좋지만

머니투데이 박종면 편집인겸 더벨 대표이사 부사장 2008.09.22 12:26
글자크기
이달 초 유령과도 같았던 ‘9월 위기설’로 시장이 요동치던 날 더벨과 머니투데이가 주최한 M&A 포럼에 참석한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한 숨을 내 쉬면서 한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교수를 하다가 금융위에 와서 여러 지표들을 봤다. 지금은 과거 외환위기 때와 정말 다르다. 시장과 정부 섹터 모두 전문성과 안정성, 투명성이 매우 높아졌다. 그럼에도 요동치는 시장을 보면 이렇게 오버리액션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이런 사태를 보면서 금융소국으로서의 비애를 느낀다."



그날 행사의 주제는 분명 M&A였지만 ‘금융소국’의 금융정책을 책임지는 관료는 주제에서 한 참 벗어나 9월 위기설에 대한 해명부터 한동안 쏟아냈다. 그는 빨리 금융위로 돌아가 시장상황을 챙겨봐야 한다며 일찍 자리를 뜨면서도 포럼에 참석한 전문가들이 적극 나서 위기설을 진화해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걸핏하면 시장주의를 외치던 미국정부가 부실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무려 1조달러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리먼은 죽이고, AIG는 살리는 식의 무원칙과 정실에 입각한 정책을 펴는 것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하면 한편에선 10년 전 우리가 당했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통쾌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금융대국이 아닌 소국이다 보니 정작 당사자인 미국보다 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미국경제가 기침을 하면 우리는 몸살을 앓고, 미국이 몸살을 앓으면 우리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지는 게 아니라 미국의 위기가 우리에겐 기회가 되는 그런 날이 언제 올까.

그런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 유럽은 분명 우리와 다르다. 미국과 대등하게 맞붙을 정도의 실력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미국이 겪고 있는 지금의 위기가 자신들에겐 세계 금융시장에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대공세를 펼치고 있다.


중국은행 중국인민은행 중국개발은행 중국CTIC그룹 중국공상은행 등 중국의 대표 은행들은 넘치는 ‘차이나 머니’를 앞세워 미국은 물론 유럽 아시아시장에서 나오는 매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다.일본도 미즈호 미쯔비시 금융그룹과 노무라증권 등이 해외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유럽계의 경우 바클레이가 부도난 미국 리먼의 투자은행부문 핵심자산을 인수했고, 글로벌 합병전략으로 세계적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스페인의 산탄데르은행은 영국의 모기지업체 A&L을 인수한데 이어 미국의 최대 저축은행 워싱턴뮤추얼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남의 불행이 나에겐 기회라는 만고불변의 시장원칙을 철저하게 이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세계 M&A 대전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명함 한번 내밀었다가 혼이 나고는 제발 미국의 위기가 빨리 수습되기만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너무도 착한 대한민국을 미국이 과연 알아주기는 할 지 모르지만 말이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이 경영위기로 헐값에 나온 미국의 대표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사실 걱정이 되긴 했다. 투자은행 업무와 M&A 분야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그의 실력을 못믿어서가 아니라 어느 금융계 인사가 전해준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행장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이 인사는 리먼 인수를 추진하는 일에 공감하지만 개인적으론 굳이 그가 왜 이런 위험한 일을 하려는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는 민행장이 리먼 출신이고 리먼 재직 당시 받은 스톡옵션 때문에 오해를 사는 것 같고, 시중에 관련 루머가 많이 돌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먼이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고 부도처리 되자 정치권을 비롯 곳곳에서 민행장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차제에 세계적 투자은행을 목표로 한 산업은행 민영화도 재검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유성행장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리먼을 인수한 것이 아니라 협상만 했을 뿐이고, 더욱이 협상내용을 뜯어보면 아주 헐값에, 부실자산은 모두 털어내고 구조조정까지 한 뒤, 더욱이 이런 조건들이 모두 충족된 것을 확인한 후 6개월 뒤쯤 자본을 투입하는 조건인데도 민유성 행장은 미국의 부도난 은행을 인수해 '제2 외환위기'를 초래할 뻔한 ‘개념 없는 은행장’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이 리먼 재직 중 받은 5만9000주의 스톡옵션을 챙기기 위해 이런 엄청난 일을 추진한 치사한 사람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바클레이는 산업은행이 당초 리먼에 제시한 것과 거의 비슷한 조건으로 리먼의 자산과 인력 일부를 인수했지만 바클레이가 ‘개념 없는 딜’을 했다고 비난하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너무 착한 건지, 아니면 정말 개념이 없는 나라인지 헷갈린다.

거의 10년 주기로 반복되는 세계적 경제 금융위기를 겪을 때 마다 금융 강대국의 바람은 더 절실해지지만 우리는 영원히 금융소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고 팔자가 아닌 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