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망령' 세계시장에 짙은 그늘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8.08.22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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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 갈등 확대 유가↑·달러↓…러, 에너지 무기화 가능성

냉전의 망령이 세계 금융시장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루지야 사태를 계기로 미국 등 서방세계와 러시아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유가가 급반등하고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냉전구도 해체이후 구축돼온 세계 경제 질서 자체가 위협받아 각국의 경제에 타격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0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중질유 가격은 전날에 비해 배럴당 5.62달러(4.9%) 상승한 121.18달러로 마감했다. 이는 이달 4일 이후 근 3주만의 최고 가격이다.



반면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다.
오후 4시38분(현지시간) 현재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유로 환율은 전날에 비해 1.52센트(1.03%) 급등(달러가치 하락)한 1.4900달러를 기록했다. 달러/파운드 환율도 0.81% 급등했다.
엔/달러 환율은 1.38엔(1.26%) 급락(엔화가치 상승)한 108.47엔을 기록중이다.
6개국 통화대비 달러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는 1.1% 급락한 76.15를 나타내고 있다.

◇ 러, '에너지 무기' 꺼내드나...원유-달러-상품시장 직격탄



국제유가가 급반등하고 달러화가치가 곤두박질친 직접적인 계기는 러시아와 미국등 서방진영 사이의 긴장 고조.

러시아는 이날 그루지야의 주요 석유 수출항을 봉쇄하고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통제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 석유 생산국이며 그루지야 지역은 카스피해 원유의 지중해 수출용 송유관이 지나가는 요충지이다.
러시아는 EU국가 원유 소비량의 4분의 1, 천연가스 소비량의 절반을 공급하고 있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삼아 공급을 중단할 경우 유럽은 중동 등 다른 공급처를 찾아야 한다. 공급확대 여력이 거의 없는 국제원유시장에서 이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가격 폭등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비엔나의 JBC에너지는 국제유가의 '정치위험 프리미엄(Political risk premium)'이 배럴당 10달러 이상으로 확대됐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고조는 유가 뿐 아니라 달러화가치 하락도 가속화시켰다.
MF 글로벌의 마이크 피츠패트릭 부사장은 "러시아군이 바르샤바로 진격했던 당시를 연상시키는 현재의 상황이 달러 약세를 초래하고 유로를 상대적으로 안전투자자산으로 부각시킬 것"이라고 전했다.

달러화 급락은 상품시장으로 투기자산을 급속히 유입시켜 안정세를 보이는 듯 하던 상품가격을 다시 폭등세로 돌려놓을 수 있다.
실제로 유가 급등과 달러화 급락의 여파로 투기자금이 상품시장으로 몰리면서 이날 NYMEX에서는 주요 상품가격 벤치마크지수인 로이터-제프리 CRB지수가 3.7% 급등한 405.92를 기록했다.



◇ '단기전' 낙관 무색...러 작심한 '무력시위'

앞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20일 폴란드에서 라도슬라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미사일 방어(MD) 기지 구축을 위해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 10기를 폴란드에 배치키로 합의했다.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을 견제하고 구 동구권을 러시아로부터 떼어 내 러시아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의도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에 대해 "이는 유럽은 물론 다른 지역에까지 군비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시리아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대응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그루지야의 남오세아티아 침공에 대응, 그루지야와 사실상 전면전에 돌입했을 당시에도 직접적인 영향은 크지 않았다. 양측의 전력차이가 워낙 커 '단기전'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루지야로 진격, 국토의 절반이상을 장악한뒤 군사작전 종료를 선언한 러시아는 철군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루지야 내 전략요충지역에서 계속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인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러시아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그루지야 사태가 '지역분쟁'을 넘어서 새로운 냉전구도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루지야를 공격한 것도 소련 연방 해체 이후 미국 중심 '1극체제' 아래 위축돼 온 러시아가 의도적인 '위력시위'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그루지야 사태, '변방의 총소리' 아니다

그루지야 사태로 촉발된 동서지역 갈등이 지속될 경우 서방국가들의 정책에도 큰 변화를 초래할수 밖에 없다. 이는 금융시장 뿐 아니라 세계 무역질서, 자본 및 노동력의 이동, 에너지 수급 등 세계 경제 체제 전반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가져올수 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미국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미-러 관계는 이라크전을 제치고 미 대선의 주요 의제로 떠오를 기세이다.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버락 오바마 후민주당 후보 지지율은 반대로 뒷걸음질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직까지야 '말싸움'수준이지만,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에너지를 무기로 삼아 유럽을 위협하고 군사적 행동반경 확대에 나서는 상황이 온다면 여파는 심각해질수 있다.
러시아 증시는 이미 올해 들어 20% 이상 급락했고, 최근 들어 그루지야 사태로 인해 하락폭이 더욱 확대돼 왔다. 하지만 러시아 시장은 여전히 '이머징 마켓' 즉, 변두리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시장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시장이 언제까지 러시아 상황을 '변방의 총소리'로 치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트래디션 에너지의 시장조사 담당 이사 애디슨 암스트롱은 "사람들은 러시아 상황이 매우 오랫동안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마침내 깨닫기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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