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에 삐친 관료 '달래기'

머니투데이 박재범 기자 2008.07.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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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의 여의도 편지]

편집자주 별명이 '제비'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릅니다.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유도 명확치 않습니다. 이름 영문 이니셜 (JB) 발음에 다소 날카로운 이미지가 겹치며 탄생한 것 같다는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이젠 이름보다 더 친숙합니다. 동여의도가 금융의 중심지라면 서여의도는 정치와 권력의 본산입니다. '제비처럼' 날렵하게 서여의도를 휘저어 재밌는 얘기가 담긴 '박씨'를 물어다 드리겠습니다.

# '조선의 킹메이커'(박기현 지음)에는 8명의 참모들이 등장한다. 정도전, 하륜, 황희, 신숙주, 조광조, 유성룡, 최명길, 채제공 등 모두 조선시대 명재상들이다.

이들 중엔 주군을 모시고 거사에 동참한 창업 공신도 있다. 정도전이나 하륜 등이 그렇다. 반면 창업 이후 발탁된 인사들도 많다. 말하자면 전문 관료들이다.



그 중에는 주군의 뜻과 다른 입장을 견지했던 이들도 있다. 세종대왕을 모신 황희 정승이 대표적이다.

그는 '충녕대군(세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적자 계승의 원칙에 어긋나고 왕권을 흔들리게 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 귀양을 살았던 인물.



하지만 세종은 그를 배척하지 않았다. 은퇴할 나이의 그를 오히려 중용했다. 세종의 '싱크탱크'였던 집현전을 맡겼다. 참신과 패기의 신진 학자들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황희의 경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현대사에선 5공화국 시절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을 꼽을 만 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던 김재익을 경제수석에 발탁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그 때 김 수석의 나이가 42세였다. 미국에서 공부한 시장경제주의자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간 만남은 어색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 수석은 그 부름에 응했다. 어려운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게 이유였다. '관료'인 자신의 출발점도 잊지 않았다.

정치적 판단 대신 관료의 소신을 철저히 지켰다. 이는 경제 안정으로 이어졌다. 최대 과제였던 물가는 안정됐고 각종 경제 개혁도 성공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을 만큼 신임도 두터웠다.

# 다른 대통령들은 '자기 사람'을 원했다. 참신한 교수들로 '스타팅 멤버'를 꾸렸다.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선 '내부'보다 '외부' 인물이 낫다는 명분이었다.

전문 관료는 꺼렸다. 내심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소위 좌파건 우파건 다르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모두 교수와 함께 청와대에 입성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오래 있진 못했다. 곧바로 '관료'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MB노믹스' 실현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당당히 청와대에 들어간 곽승준 전 국정기획수석, 김중수 전 경제수석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후임도 결국 '관료'였다.

# 이를 보는 공직 사회의 시각은 "그것 봐라"다. 새 정부 출범 초부터 공직 사회를 흔들더니 얻은 게 뭐냐는 말도 나온다.

관료의 오만함도 없진 않지만 서러움의 발현이기도 하다. 실제 MB 정부는 관료와 잘 지내지 못했다.

전임자가 '의외로' 관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은 것과 차이가 난다. MB 정부는 오히려 우파 성향의 관료들과 각을 세웠다. 이른바 '코드'가 맞다고 자부했던 이들은 서러웠다. 황희나 김재익과 비교하면 '코드 일치'에 가까운데도 말이다.

최근 국정 난맥의 한 요인으로 관료 사회 동요를 꼽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관료들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졌다. 한마디로 삐쳤다.

이제 촛불 든 국민, 속았다는 박근혜 전 대표뿐 아니라 관료들도 달래야 한다. 그리고 믿음을 줘야 한다. 황희, 김재익이 주군의 신뢰에서 탄생했듯 현 위기를 돌파할 '선수'들도 이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MB가 경제회생을 위해 들어올린 '횃불'이 무겁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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