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정치군인’과 대비해 나라를 지키는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셨다는 강조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길이라는가르침으로 들렸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전쟁중 숱한 전공으로 전사에 이름 석자를 올려놓으시기도 했다. 현재는 대전현충원에 수의 대신 평생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던 군복을 입고 누워계시다.
그 분이 살아 서울시청 광장에 서 계셨다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자문해본다. 그제는 6.25였다. 해마다 기념일이면 깨끗이 빨아둔 군복을 꺼내입고 광장에 나오셨다. 기념행사후 노병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시던 모습이 여직도 눈에 선하다.
그 분이 촛불과 다시 전경대열, 물대포가 혼재된 '난장'의 장소에 다시 섰다면. 5월초부터 시작해 몇 차례 대통령의 사과에도 불구, 꺼지지 않는 광장의 열기를 보며 그 분은 분명 ‘국가’라는 단어를 우선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은 28년전 그날을 더듬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날 그 분은 가혹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다시금 전율했다고 한다. 상무대 유리창밖을 내다보며 그 분은 세월을 되돌려 1960년 4월을 떠올렸다. 당시 육군본부 본부사령 선임장교였던 윤중령은 경비 병력을 긁어모아 경무대로 향했다고 한다.
오랜 독재와 부정선거에 분노한 시위대의 경무대 진입을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총기를 지닌 군은 언제든 발포할 권한이 현장 지휘관에게 주어져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과거의 교훈이 그 날에도 울렸을까. 상부의 즉각적인 사태 진압 주문에도 끝까지 민간인 시위는 경찰력으로 막아야한다며 군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고집했다. 그는 그 날 1949년 임관후 32년간 걸쳤던 정든 군복을 벗었다.
혹자(당시 신군부세력)는 현장 지휘관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아 사태를 키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마음의 '빚'은 추후 정치권의 머뭇거림에도 불구, 끝까지 반란 세력을 법정에 세워(기소) 갚았다. 다소 시간이 흐르더라도 역사의 단죄는 반드시 이뤄짐을 다시금 깨우쳤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 선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청계광장 인근 사무실밖으로는 시위대의 외침이 퍼진다. 그 가운데에서 그 분의 고뇌는 뭘 까. 호국(護國)의 현명한 지혜를 못내 듣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