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중국 상부(商父)가 든 보험은

강효백 경희대 중국법학과 교수 2008.06.26 12:11
글자크기

편집자주 *필자주.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황금 중국` `중국인의 상술` 등을 참조했음

[MT시평]중국 상부(商父)가 든 보험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모교는 상하이 쟈오통(交通)대학이다.(여기서 ‘交通’은 소통 또는 교류(communication)라는 의미. 交通大學은 현재 상하이, 베이징, 시안, 청두, 그리고 대만의 신주(新竹) 등 5개소에 소재하는 데 모두 명문으로 손꼽히는 이공계 위주의 종합대학들이다.)

이 대학의 창시자는 성선회(盛宣懷 1844-1916)라는 인물이다. 근대 중국의 상성(商聖)이라 불러지는 호설암(胡雪岩)의 무릎을 꿇게 만든 사람이다.
 
손문이 근대 중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듯, 성선회는 근대 중국의 상부(商父)로 떠받들어진다.



19세기 후반 중국의 해운, 광산, 통신, 방직, 철도, 은행 등 중국 근대자본주의 산물 중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의 창립과 주도, 조정과 관여 하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그는 중국의 양무운동시절 대표적 매판관료상인이었으며 신해혁명의 폭발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873년 성선회는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이라는 반관반민의 해운회사를 맡아 근대중국 최초의 주식회사로 개조하였다. 이듬해 윤선초상국은 미국의 거대 자본인 기창윤선양행(Russel&Co)을 인수 합병하였다. 당시 중국 최대 일간지 신보(申報)는 이 중국기업사상 최초의 M&A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중국 뱀이 미국 코끼리를 삼켰다.”
 
성선회는 자신의 기업제국을 건실하게 성장시켜 나갔다. 외부적으로는 인수합병을 통해 확충하거나 가격 카르텔로 연대하고 내부적으로는 구조조정과 변신을 통해 자본주의적 경영합리화를 구현한 그는 명실상부한 근대 중국 최초이자 최고의 CEO이었다. 성선회는 1896년 상하이에 중국최초의 은행인 중국통상은행을 창립하였다.

다음은 그가 국립은행 아닌 민간은행창립을 주창하며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의 일부로서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문이다.
 
“공자가 다시 태어나서 천하를 다시금 주유할 웅지가 있더라도 이제 돈이 없으면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신은 수년간 해운과 광산, 철도 등 상공업을 경영하면서 우리 자신의 은행이 없는 설움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효도가 백행(百行)의 근본이듯 은행은 백업(百業)의 근본입니다. 은행을 통해서만 국가의 재물을 순조롭게 모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은행이 있으면 서양인으로부터 차관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중국개혁 개방의 그랜드 디자이너 덩샤오핑이 가장 애호하던 사자성어인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 낸다)`는 성선회가 이미 100여 년 전에 가장 즐겨 쓰던 말이었다. 그는 실시구시를 건학이념으로 하여 북양대학당(텐진대학의 전신)과 남양대학당(상하이, 베이징, 시안, 청두, 타이완의 5개소의 쟈오통 대학들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직이 높아지면 질수록 외세의 경제침탈에 대한 경계심도, 민족자본을 축적하겠다는 정열도 식어갔다. 노년의 그의 행적은 청나라의 거의 모든 이권을 일본 등 열강에 팔아넘긴 매판자본가였다. 영락없는 매국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후세의 비판은 의외로 뭉뚝하다. 오히려 오늘날 중국사회는 성선회를 근대중국의 상부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 그의 동상과 흉상은 텐진대학과 5개 쟈오통 대학들의 경내에 있다. 한 사람을 기리는 기념물이 6개 명문대학 경내에 동시에 모셔져 후학들에게 누대로 존경받는 행복은 마오쩌뚱도 덩샤오핑도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리라.
 
비상한 혜안의 소유자, 성선회는 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후세가 그에게 가할 냉혹한 평가에 대비하여 ‘역사의 보험’을 든 것은 아니었을까.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