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CEO' 그룹이 뜨고 있다

머니투데이 최종일 기자 2008.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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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CEO論] 1-1. CEO리더십 패러다임이 바뀐다

편집자주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해 20∼30년간 오로지 조직에 충성한다.' '목표를 향해 불도저처럼 전진한다.' 이 같은 최고경영자(CEO)의 전형은 점차 옛 말이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은 '명CEO' 출신을 뽑았지만 정작 CEO 세상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신CEO'들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력과 경영스타일, 경쟁력은 기존 경영자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유학파와 해외파가 기획통이나 영업통의 국내파를 제치고 '글로벌 경영'의 선봉에 서고 있다. IT붐과 벤처대란 속에서 생존력을 다진 CEO 그룹도 속속 재계에서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들은 권위적이고 일방적 지시나 통제의 리더십 대신 튀는 상상력과 따뜻한 감성으로 조직 전체의 역량을 키워 나간다. 단기적인 실적보다는 '사회적 책임'과 '지속가능 경영'에 방점을 찍는 CEO들도 많아졌다. CEO들의 근엄한 이미지 또한 무너지고 있다. 일 중독에 빠진 '워크홀릭'CEO가 '잘 노는' CEO에게 밀리고 있다. 이제는 잘 놀아야 일도 잘하는 시대다. 경제현장에서 새로운 변화를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신CEO'. 이들의 면면을 '신CEO론'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경제를 살리고 성공을 부르는 '신경영'의 핵심동력이 바로 이 안에 있기 때문이다.

#1. "막힌 것들을 없애라. 통하게 하라." 현대카드에는 없는 것들이 많다. 사장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지정좌석제`가 없다. 서열과 상관없이 오는 순서대로 앉아서 누구나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낸다. 어느 회사에나 있는 임원실의 막힌 벽과 문도 없다. 그 자리는 투명유리가 대신 했다. CEO가 참석하는 공식행사장에선 박수 소리가 없다. 사장의 지시였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정태영 사장이 있다. 정 사장은 2003년 취임 후 서열식 문화를 배제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조직문화를 변화시켰다. 창의적 사고를 이끌기 위함이었다. 그전까지 부진에 허덕이던 현대카드는 2005년을 기점으로 흑자로 돌아섰다. 지난해에는 2810억원의 이익을 남겼다.



#2. 변대규 휴맥스 사장은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박사 출신이다. 자신이 뛰어난 교수가 될 재목은 아니라는 판단에 1989년 창업했다. 믿는 것은 젊은 혈기와 기술력밖에 없었다. 처음 5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가요반주기로 처음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첫 성공 아이템을 접었다.

1996년에 디지털 셋톱박스 사업으로 진출하며 ‘대박’에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납품한 제품의 절반이 반품되는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도전했다. 그는 지금도 "진정한 의미의 경영능력을 앞으로도 계속 키워가야 한다"고 겸손해한다. 휴맥스는 현재 연 매출 8000억 원대의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 변대규 사장이 만약 대기업 연구소에 입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3. '초등학교 일본, 중학교 한국, 고등학교 홍콩, 대학은 미국에서 졸업.' 이 특이한 성장배경과 이력의 주인공은 누굴까. 바로 강정원 국민은행장이다. 강 행장은 홍콩국제학교 졸업 후, 미국 다트머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미국 플레처대 대학원에서 국제법과 외교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씨티은행 뉴욕본사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근무하다 뱅커스트러스트와 도이치은행 한국대표, 서울은행장을 거쳐 2004년 말 국민은행장에 취임했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2조773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강 행장은 국내 금융계에 학맥이 거의 없다. 국제적 감각과 경험이 성공의 디딤돌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新)CEO' 그룹이 뜨고 있다


새로운 CEO그룹이 뜨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20여년 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공식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아이디어와 기술력만으로 성공한 CEO의 대열에 합류한 이들이 생겨났다. "잘 놀아야 일도 잘한다"는 CEO도 있다. 직원에게 군림하는 제왕적 CEO의 모습은 이제 옛말이 됐다.


이 같은 흐름은 급변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이 배경이 됐다. 지난 수년간 정보기술(IT)의 비약적 발달은 사회와 비즈니스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비즈니스 지형은 국경을 넘어 전세계로 확대됐다. 사회ㆍ문화적으로는 분권형ㆍ권한위임형 리더십이 권위주의형 리더십을 대신했다. 자율적 의사결정구조와 쌍방향 소통문화도 사회적으로 확산돼가고 있다.

한근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산업화 시대에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철저히 지켜졌기 때문에 근엄한 리더가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한 시대"라고 진단했다. 그는 "최근 촛불시위를 보면 그 변화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新)CEO' 그룹이 뜨고 있다
◇벤처형 CEO, 해외파 CEO
CEO에 오르는 길도 다양해졌다. IT의 획기적 발전이 배경이 됐다. IT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아이디어, 그리고 순수성과 모험심으로 창업에 성공, CEO된 사람들이 생겼다. 첨단기술이 비즈니스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대에 이들의 전문성은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스타 CEO로 각광받고 있다.



공대 출신 변대규 휴맥스 사장은 도전정신으로 매출 1조원을 바라보는 회사를 키워냈다.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한 안철수 KAIST 교수는 가장 존경받는 CEO로 꼽힌다.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은 인하대 3학년이던 1983년에 창업, 현재는 비트컴퓨터를 의료정보업계의 변화를 리드하고 있는 회사로 키웠다.

글로벌 비즈니스 감각도 CEO에게 요구된다. 이에 따라 외국학교를 졸업하거나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한 이들이 대거 CEO로 발탁되고 있다. 외국계 기업 출신도 증가했다. 30, 40대 젊은 CEO 중에선 순수 국내파를 찾기 힘들 정도다. 특히 금융권에서 해외파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실제 지난해 코스피시장 735개 상장사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사업보고서를 종합한 결과에 따르면 외국대학 출신 비중은 2002년 6월 말 현재 18.6%에서 20.5%(202명)로 1.9%포인트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에 서울대 출신 CEO의 비중은 22.9%에서 17.9%로 하락했다.
▲위쪽 왼쪽부터. 변대규 휴맥스 사장/남중수 KT 사장/강정원 국민은행장<br>
아래쪽 왼쪽부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구본준 LG상사 부회장▲위쪽 왼쪽부터. 변대규 휴맥스 사장/남중수 KT 사장/강정원 국민은행장
아래쪽 왼쪽부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구본준 LG상사 부회장
◇감성 CEO, 사회공헌 CEO, 보보스 CEO
조영주 KTF 사장은 사내 행사에서 색소폰을 불고 지휘를 하기도 했다. 자신을 최고서비스경영자(CSO)라고 한다. 심영섭 우림건설 회장은 매달 수천권의 책을 회사와 협력업체 직원에게 보낸다.



"무더운 여름에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임원들과 이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시는 가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취임 초 초복을 앞두고 임원 가족들에게 삼계탕을 선물하며, 동봉한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현 회장은 여름휴가를 금강산 신입사원 수련대회에서 보낸다. 그의 감성경영은 한때 어려웠던 그룹의 난관 돌파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매년 초 신입사원과 등산을 한다. 올해 초 밸런타인데이에는 그룹 계열사 전체 여직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기도 했다.

리더십에선 이처럼 `감성 CEO'들이 대세다. 이들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조직성과의 향상을 위해서는 조직내 신바람 운동과 열정적 분위기 조성, 감성에너지를 모으는 팀워크 구축이 필수라고 믿는다. 한근태 교수는 "지시, 통제, 명령하달식 리더십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며 "이제는 직원들이 스스로 공감하고 설득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시대"라고 말했다.

CEO들의 경영에 대한 인식도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을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경영전략의 한 부분으로 활용하는 CEO가 나타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고, 미래 경영의 핵심으로 윤리경영과 친환경경영을 중시하는 CEO들도 이에 속한다.



석종훈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은 발달장애아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꿈이다. 다음은 임직원의 스톡옵션 등을 모아 `지구촌 희망학교'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남승우 풀무원 사장은 '장수기업이 되기 위해선 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국내 식품기업 중 최초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는 매출의 0.1%를 적립하는 '지구사랑기금'과 아토피아동 지원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CEO들의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일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쓰지 않는다. '잘 놀아야 일도 잘한다'는 생각으로 취미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또 효율적인 휴가 활용을 권장하는 CEO들이 늘고 있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 교수는 "창의력이 새로운 힘으로 부상한 지금 시대에 적절한 휴식은 창의력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했다.

구자열 LS전선 부회장은 2002년 독일에서 열린 `트랜스알프스 산악자전거대회에 참가해 7박8일 동안 650㎞를 완주했다. 이미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태욱 LIG건영 사장은 지난해 회사 노조위원장, 직원 대표, 임원들과 함께 안나푸르나 원정을 다녀왔다. 구본준 LG상사 부회장은 공휴일 사이에 낀 샌드위치 근무일은 모두 휴일로 돌렸다.



최신 경영트렌드를 외면하고, 혁신으로 무장하지 않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업이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CEO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CEO의 전략 수립에 따라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글로벌 전쟁에서 기업의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CEO의 등장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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