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화려했고, 비폭력은 위대했다

머니투데이 방형국 부국장 겸 전국사회부장 2008.06.11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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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

10일 12시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펼쳐놓은 난장은 장구와 꽹과리, 웃음소리, 박수소리로 종로통을 수놓았다.

등에 배낭을 맨 채 덩더∼쿵 장구소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여학생의 춤은 수줍었고, 절로 흥이 나는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얼굴에 땀을 번득이며 뽐내는 춤사위는 흐드러졌다.

그 옆을 지나며 '고시철회'를 외치나 긴장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해맑은 대학생들의 얼굴이나 시위현장 도로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케이크에 촛불을 켜놓고 생일잔치를 하는 모습이 무더웠던 21년전 오늘 최루가스에 눈물과 콧물에 뒤범벅이 된 채 경찰에 쫓겨 명동 어느 구멍가게에 숨어들었던 기자에게는 무심하게만 느껴졌다.



↑ 10일 저녁 서울 광화문네거리에서 열린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에 참석한 한 어린이가 광화문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이어진 촛불 띠를 연결하고 있다. ⓒ이명근 기자↑ 10일 저녁 서울 광화문네거리에서 열린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에 참석한 한 어린이가 광화문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이어진 촛불 띠를 연결하고 있다. ⓒ이명근 기자


한손에는 촛불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연인의 손을 맞잡은 채 종로통을 거니는 젊은 남녀에게 일련의 촛불집회는 시위현장이 아니라, 데이트 장소였을터.

좀더 있겠다고 조르는 어린 딸에게 이제 집으로 가자고 설득하는 안경 낀 아빠의 눈에는 졸음기만 가득하다.



경찰이 설치한 컨테이너는 예술품으로 승화됐다. 그곳에는 한때 태극기가 걸려있었고, 그것은 어린이 등 다양한 계층의 참가자들이 각종 스티커와 쪽지에 그림을 그려넣거나 자유로운 낙서를 하고, 꽃을 장식하는 캔버스였다.

스티로폼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경찰 저지선을 뚫고 기필코 청와대로 행진하겠다는 일부 과격 시위대들을 '비폭력' 구호로 진정시키고 자율적으로 스티로폼 사다리를 치운 시민들의 성숙한 모습은 이날 촛불잔치의 백미였다.

비폭력이어서 그 울림이 더 크고 매섭다.


주최측 주장 최대 70만명이 모인 시위가 비폭력으로 끝난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비폭력 시위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모든이의 카타르시스였다. 이땅에 평화시위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대단히 크다.

21년전에도, 지금도 시민들은 똑같이 '정권 타도'를 외쳤으나, 전자는 군사정권의 폭거에 맞서 싸웠고, 후자는 '국민을 무시'하는 국정운영을 꾸중하고 있다.

21년전에는 민주주의 제도의 형식적 도입에 시급했지만, 지금은 '절차와 투명성' 등 보다 완성도 높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데서 차이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도, 야당도 그걸 알아야 한다.

우선 청와대는 '고소영', '강부자'가 아닌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있는 인사로 '무정부'상태의 국가위기를 빨리 극복하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국민 눈높이에 맞는 국정운영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권력암투에 빠져있는 여당도, 촛불집회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는 야당도 쇠고기 파동으로 빚어진 작금의 사태를 추스리기 위해 하루빨리 머리를 맞대기를 권고한다.

쇠고기 파동을 명분으로 온갖 요구를 분출시키고 있는 각종 단체들도 이번에 시민들이 보인 성숙한 모습에서 절제의 미학을 배워야 한다. 촛불집회 참가를 위해 잔업을 거부하고 공장을 세운 현대자동차 노조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의 자기절제를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끝까지 욕구를 참아내고 비폭력으로 시위를 마무리한 일반 시민들이 현대차 노조의 파업에 왜 야유와 비난을 보내는 지, 촛불집회에 참석한 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봐야 할 것이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해마다 되풀이 하는 파업은 사회와 경제에 대한 폭력이다. 일터로 돌아가라. 일을 하라.

총파업을 예고해놓고 있는 화물연대도 평화시위를 고수한 일반 시민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정부도, 화주도 화물운송자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곤혹스러움을 잘 알고 있다.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파업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경제는 심각한 상황이다. 원유와 원자재 가격 급등, 살인적인 물가, 식량난, 고실업률, 넘쳐나는 미분양 아파트 등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난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어느 하나만 터져도 도미노처럼 우리 경제에 커다란 연쇄충격을 줄 수있다.

와중에 공무원 연금개선, 교육개혁, 공기업 민영화 등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들에는 손 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이제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민들도 기다리고 지켜볼 때가 됐다. 비폭력 시위로 항의표시는 충분히 했다. 국무총리와 장관, 대통령실장과 수석들 모두가 쇠고기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대통령도 "국민정서를 헤아리지 못했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쇠고기 파동 등 우리 앞에 놓여있는 난제들을 이제 차분히 해결해야 할 때다. 촛불은 화려했고, 비폭력은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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