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하는 이머징마켓 성장 DNA의 비밀

브라질·멕시코=글·권성희, 사진·임영준 기자 2008.01.01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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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징마켓의 어메이징 기업]<1-3>

▲발리의 연말 기자간담회.<br>
로저 아그넬리 CEO가 혼자 간담회를 이끌고 있다.▲발리의 연말 기자간담회.
로저 아그넬리 CEO가 혼자 간담회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12월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중심가. 세계 2위의 철광석회사인 발리의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로저 아그넬리 최고경영자(CEO)는 기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혼자 서서 2시간 동안 기자간담회를 이끌었다. 그는 혼자 발리의 경영상황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대답을 하기 위해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경영 현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자들은 점심을 먹다 손을 들어 질문했다. 아그넬리 CEO 바로 코 앞에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답변을 듣는 기자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자유롭고 편안한 '소통의 자리' 그 자체였다. 대기업의 CEO가 어떤 임원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2시간을 서서 열정적으로 제스처를 해가며 간담회를 진행하는 모습은 한국에선 결코 본 적이 없다. 발리는 브라질에서 매출액순으로 5위, 기업가치순으론 1위 기업이다. 매출액은 한국의 KT와 현대중공업보다 더 많다.



▲페트로브라스가 운영하는 주유소.▲페트로브라스가 운영하는 주유소.
브라질에서 가장 큰 회사인 페트로브라스. 국영 석유회사임에도 민간회사 못지않은 효율성과 기술력을 자랑한다. 지난해 11월초에는 해저 2000m 지점에서 암반을 뚫고 4000m를 시추하는 독보적인 심해 시추기술로 투피 유전을 개발했다. 페트로브라스에서 투자자관계(IR)를 담당하고 있는 엘데 루이스 파에스 모레이라 레이티 부장에게 "엑슨모빌과 BP 같은 메이저 석유회사에 버금가는 심해 시추기술을 갖게 된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에 앞서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 최고"라며 자부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질문부터 수정했다.

비상하는 이머징마켓 성장 DNA의 비밀
멕시코의 기업도시 몬테레이에 위치한 세계 3위의 시멘트회사 세멕스. 본사는 커다란 공원 같았다. 큰 공원에 독특한 디자인의 높지 않은 건물이 한 채 서 있는 풍경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멕시코의 모국어인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가 들렸다. 호르헤 페레스 기업 커뮤니케이션 담당 차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세멕스 전체 직원 6만7000명 중 멕시코 사람은 1만1000명뿐"이라며 "멕시코 본사만 해도 미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어 사실상 영어가 세멕스의 공식 통용어"라고 답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물리치고 세계 1위의 부자로 등극했다고 화제를 모았던 카를로스 슬림 회장이 소유한 이동통신회사 아메리카 모바일(텔멕스의 지주사).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PR(홍보)을 담당하고 있는 패트리시아 라미레스 발디비아 부장을 만났다.

▲아메리카 모빌과 아메리카 모빌의 <br>
멕시코 이통 브랜드인 텔셀 본사 모습▲아메리카 모빌과 아메리카 모빌의
멕시코 이통 브랜드인 텔셀 본사 모습
아메리카 모바일이 포춘 500대 기업에 포함된 것은 멕시코 이동통신시장을 70% 이상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도발적으로 물어봤다. 그녀는 "아메리카 모바일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중남미에서 가장 큰 이동통신회사"라며 "콜롬비아에서 1위이며 브라질과 칠레를 포함한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도 모두 3위권에 든다"고 말했다. 통신 선불카드로 미국 이동통신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정착한 명실상부한 글로벌 이동통신회사라는 설명이었다.

최근 이머징마켓 출신의 글로벌 기업들이 약진하고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만큼이나 다른 이머징마켓 글로벌 기업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이들 기업은 한국의 글로벌 기업보다 어떤 점에서는 더 뛰어나다. 발리는 상하관계가 유연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세멕스는 인력구성이 훨씬 더 글로벌하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발리와 세멕스 모두 세계적인 기업을 인수 합병(M&A)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M&A의 선수들이란 점도 한국 기업을 앞선다. 세멕스의 페레스 차장은 "우리의 합병 후 통합(PMI) 담당 팀은 세계 최고 수준이자 세멕스 최대의 기업 비밀"이라고 말했다. 아메리카 모빌은 사업 확장의 귀재인 슬림 회장의 지휘로 아메리카 대륙의 통신시장을 석권하고 있고 페트로브라스는 이머징마켓의 국영기업이란 한계를 벗어나 메이저 석유업체를 능가하는 기술력을 확보했다.

이머징마켓 기업은 더 이상 불투명한 경영, 후진적인 시스템, 열등한 기술로 낙인 찍힌 이류, 삼류기업이 아니다. 오히려 선진국 기업들을 인수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다. 인도의 '삼성'이라 불리는 타타그룹의 타타스틸은 지난해 영국의 거대 철강업체 코러스를 인수하면서 세계 56위에서 5위의 철강업체로 도약했고 세멕스는 지난해 7월 호주의 시멘트 회사인 링커 그룹을 사들여 시멘트업계 1, 2위인 프랑스의 라파즈와 스위스의 홀심을 바짝 추격했다. 2006년에는 발리가 캐나다의 니켈 생산업체인 인코를 인수, 니켈 가격이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기 직전 기민하게 니켈로 사업을 확장했다.



앙트완 반 아그마엘 EMM(Emerging Market Management) 회장은 "경제 발전의 변방지대였던 제3세계 경제가 미래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 지배자로 부상할 것"이라며 "이러한 구심점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새롭게 탄생한 이머징마켓 글로벌 기업들"이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경제에서 힘의 균형이 이머징마켓 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머징마켓 기업이 미래 세계 경제의 발전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선전하고 있다. 포춘 500대 기업에도 이머징마켓으로선 중국 다음으로 많은 기업이 포함됐다. 그러나 아그마엘 회장은 "경제학 원론에 따르면 기업에도 수명이 있어 초기에는 빨리 성장하지만 기업 규모가 커지고 세계 최고 수준에 다가갈수록 구시대적 고정관념이라는 리스크에 빠질 수 있다"며 "성공신화를 이룬 많은 한국 기업들도 이런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기업은 위만 보고 달려왔고 그 결과로 몇몇 산업에서는 선두권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이머징마켓 기업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선진국 기업마저 집어 삼키며 무섭게 질주하는 이머징마켓 기업들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이머징마켓 시대'인 21세기에 한국 기업의 미래는 밝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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