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그저 '유행'일 뿐이다

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2007.12.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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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으로 본 세상]진지하게 성찰하는 연말이 됐으면

유행은 그저 '유행'일 뿐이다


요즘 들어 몸담고 있는 분야인 패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패션을 전공으로 선택했으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이 분야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스스로에게 맞는 길인지, 정말로 의미가 있는 길인지를 알지 못해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몇 년 동안은 계속 진로에 대한 고민을 벗지 못했다.

패션에 대한 진짜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한참 뒤인 어느 날,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 패션을 접했을 때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들끓는 열정, 용기같은 것이 거스를 수 없이 폭발되던 시대, 또한 그런 열정이 가슴벅찬 현실로 눈앞에서 이뤄지던 시대에도 세상의 한 켠에는 패션이 존재했다.



돌이켜보면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정치적 의의는 얼마나 큰 것인가. 계급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또 그것이 이후의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생각하면 프랑스 혁명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곰곰인 한번 생각해보자.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 그 시대의 한복판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작과는 달리, 점차 혁명의 시대를 견뎌간다는 것은 그리 아름답거나 숭고한 것만은 아닌 매우 아찔하고 두려운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감격어린 혁명의 기쁨이 잦아들 무렵 쯤에는 하루가 다르게 길로틴에서 처형되는 사람들과, 무질서, 잔인함을 감히 들먹이기엔 너무도 어마어마한 대의(大義) 앞에서 대중들은 점점 피에 질리고 무력해져 갔다.

이런 소외감은 언제나 패션으로 스며든다. 점차 이 시기의 파티에 참석했던 여성들 사이에는 해괴한 유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길로틴에서 처형되던 사람들의 마구 자른 듯한 헝클어진 헤어스타일을 흉내내고, 목에는 칼로 그은 것처럼 빨갛고 가느다란 띠를 매었다.

또한 그들의 귀에는 길로틴 모양의 귀걸이가 달려져 있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한 가문을 몰락시키기도 한 이 비장한 장치가 소녀들의 귀에서 달랑거리는 장신구가 되었다는 것은 묘한 조롱과 비천함으로 이어졌다.


사실 여성들은 큰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저 그저 심각한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무언가 진지하고 숭고한 분위기를 흉내내기 위해 충격적인 복장으로 파티에 나와 '나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구요'라는 자기 표현을 내비치는 것이 아마도 그들이 의도하는 전부였을 것이다.

이 유행은 당시의 진지한 이들에겐 참으로 불편한 것이었다. 잘린 목을 흉내내고 단두대 귀걸이를 하다니 이 얼마나 생각없는 일인가. 그러나 철없는 소녀들의 유행을 그들은 어쩔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통제한다는 것은 시대적 숭고함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치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패션은 잘 통제되기 어렵다. 패션을 최후의 1인까지 통제하기 위해 잔인한 정책을 쓰는 통치자는 거의 없다. 미니 스커트와 장발은 가장 억압이 심했던 시기에도 꿋꿋이 명맥을 이어나갔고, 장엄한 혁명의 시대에도 패션은 혁명의 비장함을 거리의 유행으로 전락시켰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너무 진지한 시대, 대의가 휴머니즘을 훌쩍 넘어버린 시대에서 패션만큼 인간적인 것은 없다고 말이다. 이 독특한 양념은, 때로는 순수주의나 이상주의가 불러올 수 있는 무서운 극단으로부터 우리를 정신차리게 해준다.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너그러움과 유머감각을 기묘하게 가르치면서 말이다.

나는 패션의 이러한 역할이 너무도 좋다. 그리고 이 같은 진지함과 키치함의 밸런스는 어쩐지 완벽하다고 생각된다. 세상은 어차피 한 쪽을 완전히 베어낼 수 없는 구조임을 알게 해준다고나 할까. 정말이지 패션은 우리에게 모순을 껴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종종 지혜롭게 알려준다.

그러나 요즘 들어, 패션은 점차 갈 곳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패션이 양념이 되어야 할 진지함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숭고하고 진지한 판단 기준들이 점차 패셔너블한 판단 기준으로 바뀌어 가면서, 무엇이 패션이고, 무엇이 철학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만 같다.

모든 것이 너무나 '패셔너블'해졌다. 공직자들은 임기 내에 무언가 가시적인 '한 껀'을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억해주니까 그는 패셔너블한 것이 하고 싶은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의 법안들은 언제나 국회를 몇 년씩 표류한다. 그런 것은 유행이 아니니까 아무도 결론짓기 싫어한다.

미디어에도 패셔너블한 기사가 넘쳐난다. 진지한 속사정은 언제나 패셔너블한 문장에 묻혀버린다. 사람들은 패션에 동참하기 위해 가장 패셔너블한 뉴스를 입에 담고 재생산해낸다. 이런 무의미한 반복에는 실제로 누구의 견해도 담겨 있지 않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므로 어떨 때는 국민의 의견이 되어버린다.

국민들은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런 외침 또한 패셔너블하게 취급된다. 다른 무엇보다 올해의 성장률 수치가 빠르게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밑거름'이라든가, 구조적인 문제를 고치기 위한 투자라든가 하는 것들은 군내나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그런 클래식한 것들은 패셔너블하지 않으므로, 트렌디한 껍데기 지표를 맞추어야 인정받는다.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쏟아져서 생태계가 그것을 복구하는데는 2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자연에는 패션이라는 것이 없어서, 마땅한 시간과 노력을 마땅하게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느 날부턴가 마땅함의 논리, 클래식한 논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게 된 우리는 그 같은 재앙을 너무 쉬이 불러들였다.

진지한 문제가 자꾸만 패셔너블해지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패션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는 종국엔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행주기곡선은 점차 대안을 마련할 만한 완만한 하락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치달은 종착점은 그저 벼랑일 뿐이다.

진지한 시대에서 양념 같은 패션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전공에 대한 확신을 가졌었지만, 요즘은 또다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패셔너블한 시대에서 패션을 진지하게 풀어보고 싶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었던 걸까.

요즘들어 기다림이나 인내, 견딘다는 것, 시간을 들여 훈련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나 정말로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려 한다면, 패션의 본래적 기원인 '카운터트렌드(counter trend)'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샘 힐(sam hill)은 그의 저서 '60trend 60chance'에서 모든 트렌드는 카운터트렌드, 즉 해당 트렌드에 반대되는 트렌드를 동반한다고 지적했다. 카운터트렌드는 현재의 트렌드가 지겨워질 무렵 종종 새로운 트렌드로 급부상하곤 한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카운터트렌드가 잘 발달하지 않는 나라 중 하나다. 참여적이고 열정적인 우리의 특성은, 때로 무한한 에너지와 협동정신으로 뭉쳐지기도 하지만, 트렌드에 있어서만큼은 외골수로 비쳐지기도 한다. 반골기질 보다는 하나의 대세에 참여하는 것을 더 보기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한 시각에서 보자면, 진지함에 대한 열망은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2006년 미국 8대 비즈니스 트렌드 중 하나로 지적된 것은 다름아닌 '진정성(Authenticity)'이었다.

또한 점점 커가는 소비자들의 로하스(Lohas) 운동이나, 패리스 힐튼을 젖히는 오프라 윈프리의 인기 역시, 적어도 잊어서는 안될 최소한의 지성이나 진지함을 평범한 삶에 연결시키려는 가시적 움직임 중 하나다.

2007년이 끝나가고 있다. 올 연말은 대선도 마무리되었고, 2008년은 정말이지 새로운 한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충만하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2008년을 살아가게 될까.

2007년에 대한 감사와 신년의 복을 바라는 마음,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은 올 연말에도 변함이 없다. 여기에 하나를 더 얹는다면, 무엇보다 2008년에는 진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마땅한 시간과 마땅한 노력을 들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올 한해는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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