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보는 당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이었고 이 전 의원은 야당인 민주당 지역구 의원이 됐다. 당까지 함께 하게 된 것은 97년 민주당이 여러 과정을 거치며 민자당의 후신인 한나라당과 합치면서부터였다.
샐러리맨의 신화긴 했지만 전문 경영인이었던 이 후보는 자신의 돈으로 창업하겠다는 사업상의 성공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주장이 엇갈리고는 있지만 BBK, LKe뱅크, e뱅크증권중개 등이 성공수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후보의 6 ~ 7년여 뒤 발목을 잡게 된다. 동업자(?) 김경준의 귀국 이후로 여타 후보 모두의 공박을 받게 되지만 검찰은 '혐의 없음' 결정으로 결국 이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공격자의 주장대로라면 증거를 하나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완전 범죄의 결과일 테고 이 후보측 설명대로라면 무고한 모함에 대한 결백의 입증이다.
이 전 의원은 2003년 한나라당에서 현재의 여권으로 옮기는 정체성 회복에 나서지만 2004년 총선에서 낙선한다. 그리고 사회운동으로 다시 돌아왔고 두달 뒤 장준하기념사업회를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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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회의 재원 마련이 쉽지 않자 그는 여러 방법을 모색했다. 만군 대위 출신 권력자 박정희에 비견해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재야 대통령이라고도 불렸던 장준하는 이제 잊혀진 인물이 되었기 때문일까. 실제로 장준하의 아들도 논란은 있지만 사기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이 전 의원은 주수도 회장의 돈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법정 공방 끝에 구속 수감됐다.
열혈청년이었던 6.3 동지 두 사람의 운명은 앞으로 더 극명히 갈린다. 두 사람은 6.3사태 당시에는 아스팔트 위에서 애국가를 나란히 불렀겠지만 내년 2월이 되면 교도소와 국회 앞(취임식 장소)이라는 다른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채 같은 노래를 듣게 될런지 모른다. 장준하로 상징되고 이부영이 한때나마 떠받쳤던 민주화운동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고(?) 일단은 성공하고 부자되자는 이명박 후보의 구호는 귀에 쟁쟁한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