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Save)'의 대가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7.10.0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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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뉴욕리포트

미국으로 이사온지 한달여.
세입자가 바뀐 걸 알고, 온갖 판촉 우편물들이 집으로 날아오기 시작한다. 산더미같은 우편물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는 단어가 '세이브(Save:절약,저축)'이다.
"쓰는 만큼 버는 겁니다(More spend, More save)"는 이미 고전적인 표현이고,
'First come, First serve(먼저 온 사람 우선)'의 패러디 버전 'First come, First save(먼저 쓰는게 장땡)'같은 표현도 몇년새 관용구로 등장했다. 유통 체인점 이름중에는 '쓰고 버는 가게(Shop N Save)'도 있다.

10년전 미국에 머무를 당시나 지금이나 '세이브의 유혹'은 여전하다. 그리고 요 몇년새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세이브'의 대상은 단연 주택이었다.
이자를 물면서 돈을 빌려서라도 집을 사두면 집값은 올라갈테니 '쓰는게 버는것'이라는 인식이 몇년간 상식이 됐었다.
모기지대출 부실 문제가 불거진지 한참 됐지만, 요즘도 차를 몰고 가다보면 "한달에 199달러면 집을 렌트하는게 아니라 소유할수 있습니다" "(신용도에 상관없이) 즉시 대출해드립니다"는 라디오 광고를 어김없이 들을수 있다.



이제 미국인들은 그렇게 'Save 아닌 Save'를 즐기던 대가를 치르고 있다.
무리하게 돈을 빌려 능력을 넘는 집을 샀던 사람들은 그게 세이브가 아니라 스펜드(spend)였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세이브를 부추겼던 금융회사들 역시 부실대출로 골병이 들었다.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의 금리인하로 일부 '탕감'효과를 얻긴 했지만 아직 갈길은 멀다.

미국 정부나 FRB, 당사자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촉발된 신용경색현상이 '건전성(Solvency)'의 문제가 아니라 '유동성(Liquidity)'문제 수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일시적으로 자금이 말렸을뿐 펀더멘털은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전성이냐 유동성이냐' 논란이 허망하다는 것을 10년전 우리는 금융위기 과정에서 이미 겪었다. 4년전 카드발 금융대란에서는 과소비(미국식으로 말하면, 과도한 Save)로 촉발된 신용위기를 제대로 경험했다.

한국의 정부, 감독기관, 중앙은행도 10년전 "언론이 유동성문제와 건전성문제도 구별하지 못한다"며 시장에 유동성 공급만 이뤄지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금융기관들은 망하거나 주인이 바뀌는 운명에 처했다. 부실을 처리하는 과정에는 막대한 공적 자산이 투입됐다. 정보의 유통이 빠르고, 시장의 '허딩(Herding:군집행태)'이 뚜렷한 상황에서는 유동성 문제가 곧바로 건전성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학습 결과이다.

정부건 금융회사건 개인이건 마찬가지다. 금고가 한번 비게 되고, 이자를 한번 연체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걷잡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든다.
영국의 노던록 지점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10년전 영업정지된 종금사, 신용금고, 지방은행들 앞에서 장사진을 쳤던 투자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게 가혹한 훈수를 두던 '금융 선진국'이 우리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을 보는 심정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떠나) 일면 고소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10년전 이미 겪었다고 해서 다시 겪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은 망각하고, 시장은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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