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키워드 '논어'와 '일본'

머니투데이 성화용 기자 2004.10.0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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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행]삼성, 중교리에서 타임스퀘어까지 ②

사업가 이병철의 일생을 상징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논어(論語)'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호암(湖巖) 스스로 '일생을 통해 가장 감명깊은 책'으로 든 논어는 유교적 가치관을 상징한다. 그는 천부의 재능과 감을 지닌 타고난 사업가였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유교 이념에 충실했다.

그는 최고경영자의 자질로 '인격'을 꼽았다. 인격적으로 호소하는 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인품, 이것이 '사장'의 으뜸가는 자질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경영자는 범인(凡人)과 달라야 하며 부하직원의 추앙을 받을만 해야 한다'고 했고 '사장이 될 수 있는 그릇이 따로 있다'고도 했다.



치밀한 계획, 통솔력, 판단력, 아이디어,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사장감이 아니라는 게 호암의 지론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 : 안으로는 인격적으로 완성되고 밖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자질을 함께 갖춤)'의 이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공부를 통해 인격의 완성을 이루어낸 성숙한 인격자들이 이상적 태평성세를 이루는 주체가 돼야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을 철저히 그의 사업 이념에 대입했다.



스스로 '인생의 신념'으로 여겨온 '사업보국'이나 '공존공영'의 도리는 공자가 말하는 '대동(大同)사회'의 실현에 다름 아니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사업윤리의 혼재. 이것이 사업가 호암을 특징 짓고 나아가서 삼성이라는 기업의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셔츠의 구김 하나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만큼 깨끗하고 정돈된 일상에 스스로를 묶어뒀다. 범사(凡事)에도 승부에도 완벽하려 했던 철저한 자기 규율. 그것은 의지의 발현이기에 앞서 혈연과 교육, 성장 과정을 통해 이해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5세때부터 문산정에서 한학교육

그는 5세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그 자취가 지금도 중교리(경남 의령군)에 그대로 남아있다.

생가가 있는 마을을 나와 의령읍 방향으로 지방도로를 타고 500미터쯤 가면 오른편으로 '문산사(文山寺)'라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이정표가 보인다. 샛길이 나 있다.

차가 겨우 다닐 정도의 포장이 안된 한적한 오솔길을 10분쯤 걸어 오르면 열간도 안되는 작은 절 문산사가 계단위로 보인다. 계곡물이 휘감아 흐르는 그 아래터에 지어진 작은 기와집 한 채. 이 곳이 바로 호암의 정신세계를 일궈낸 '문산정(文山亭)'이다. (사진)
이병철의 키워드 '논어'와 '일본'


이병철의 키워드 '논어'와 '일본'
문산정은 호암의 조부인 이홍석(李洪錫)이 자신의 호(文山)를 따서 만년에 지은 서당이다. 조부 사후에 태어난 호암은 이곳에서 천자문부터 시작해 통감, 논어를 통독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채 2~3리도 안되는 거리의 문산정이지만 워낙 숲이 두터워 마치 전혀 다른 곳에 온 듯 했다. 지난 밤 내린 비로 계곡물이 불어있었다.

물소리와 한적한 새소리가 어우러져 은거한 선비의 수행터로는 더할 나위 없을 듯 했지만 올망 졸망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으로는 너무 외진 것 아닌가 싶었다. 혹시 윗 채 문산사에서 호암의 옛 자취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들러 봤다. 그러나 절에는 겨울용 털신만 가지런히 정리돼 있을 뿐 인적이 없었다.

내 생각은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호암은 훈장으로부터 '문산공의 손자가 이래서야…' 하는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늦된 학동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일상적인 교육 프로그램에서는 범재(凡才)에 그쳤던 것 같다. 남들이 서너달이면 된다는 천자문을 떼는 데 1년 남짓 걸렸고 이후의 보통학교와 중학교 때 성적도 중위권을 못 넘어섰다.

그러나 10세까지 이어진 한학 수업과 그의 평생 사표가 됐던 부친이 생활속에 보여준 향리 유생으로서의 몸가짐은 고스란히 소년 이병철의 뇌리에 각인된다.

호암은 자전(自傳)을 통해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오히려 만족한다. (중략)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법은 행위의 사후에 작용하지만 내적 규범은 인간사회의 규율에 적대하는 행위의 발생을 미리 막는다. (중략)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그의 부친 이찬우(李纘雨)가 전해 준 처세훈 역시 유교철학에 맞 닿아 있다. '매사에 성급하지 말아야 한다. 무리하게 사물을 처리하려 들면 안된다'고 했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생활윤리 가운데 신(信)을 강조해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신용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호암은 만년에 갈수록 스스로의 자화상에 옛적 부친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돼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철저한 자기절제를 통해 84세의 수를 누린 그의 부친과 위암 수술 후 담배를 끊고 다시 건강을 되찾은 자신의 모습을 대비하기도 했고 신용을 생명으로 하는 삼성의 기업정신에 부친의 유지가 숨어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함안역, 신문화를 향한 출구

유교 이데올로기를 뇌리에 새긴 유년시절의 말미(12세)에 호암은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에 들어가 '개화(開化)'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한 학기를 지수보통에 다닌 후 여름방학이 끝나자 그는 그 해 9월 마침내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호암의 유교적 가치관에 '신(新)문화'의 채널이 뚫리는 순간이다.

이병철의 키워드 '논어'와 '일본'
호암은 함안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를 탄다. 의령군에 인접한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58-2번지. 1920년대에 '보통역'으로 개통해 한 때 번성하기도 했지만 인구가 줄고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요즘은 여객이 많지 않다.

의령에서 함안역까지는 승용차로 20분이 채 안 걸렸다. 함안역은 옛적 그곳에 그대로 있지만 역사는 새로 지었다. 호암의 서울유학을 떠올릴 단서가 도무지 남아 있지 않았다.

역사 사진을 허가 없이 찍을 수 없다는 역무원에게 기행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대뜸 아는 체를 했다. 진주가 고향이라는 그는 놀랍게도(?) 호암이 함안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선선히 안내해 주는 역무원을 따라 서울 방향의 철로 끝에 서서 호암을 추억했다. 그를 함안역까지 바래다 준 선친은 서울에서 조심해야 할 일들을 자상하게 일러줬다고 한다. 12세의 소년은 이 먼길을 떠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병철의 키워드 '논어'와 '일본'
일본을 가장 잘 활용한 사업가

이후 수송보통학교와 중동중학을 다니던 그는 7년여의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마침내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함안역을 통해 '신세계'로 열린 문이 마침내 호암 일생의 두번째 키워드인 '일본'행 통로로 연결 되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일본'을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한일합방이 되던 해(1910년)에 태어났고 일제하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며 태평양전쟁의 전화를 피해 한 때 사업을 접기도 했다.

그보다 그는 '일본'을 제대로 이용했던 사업가였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사업확장의 거울로 삼았다. 일본내 강력한 '지인(知人)네트워크' 를 만들어 철저히 써먹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제일제당 설립(1953년) 때 일본의 미쓰이물산에 견적서를 의뢰하고 설비를 발주해 '산업자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마다 대개 일본의 네트워크로부터 자문을 받거나 제휴 또는 설비도입 등 직간접으로 연을 맺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5.16 군사 쿠데타 때는 도쿄의 제국호텔에 머물렀고 삼성그룹이 정립된 후 매년 정월이면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사업아이디어를 모색한 '도쿄 구상'도 유명하다.

그는 일본유학을 떠나는 길,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부관연락선상에서 일본인 경찰로부터 받은 모욕을 평생 잊지 못했다. 반면 3대째 가업을 이은 이발사와 예약시간보다 늦게 도착해 음식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며 호통을 쳤던 복요리 전문점 주인 등 철저한 직업정신을 보여준 일본인에 대해서는 스스럼 없이 존경을 표하며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실용주의자요 천생 사업가다. 1980년대 반도체사업의 초석을 마련하기까지 그는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배우고 활용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호암과 일본의 궁합을 해석하는데는 '유교적 가치관'이 단서가 될 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산업화와 근대화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동양적인' 기업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엄격한 자기절제와 가부장적 책임을 요구하는 기업가 정신. 유교이념을 평생 등에 이고 살면서도 사업가로 우뚝 선 그의 미덕이요, 또한 한계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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