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지갑, 중산층의 지갑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2004.08.1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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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본 세상]

"부자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점심 자리에서 매고 있는 넥타이가 명품이냐 아니냐를 화제 삼다가 나온 말인만큼 이헌재 부총리가 작심하고 경제운용방향을 밝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반찬거리 이야기조차 가볍게 넘어갈 여유를 잃어버린 탓에 부총리의 말은 '부자들의 지갑을 닫아두는 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경제가 안돌아간다'는 이야기로 확대재생산됐다. 그게 불편해서였는지 이병완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난 일요일 "외환위기이후 중산층이 흐트러지면서 내수가 빨리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중산층 육성을 통해 내수를 견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의 지갑을 열 것인지를 두고 정부 내 경제철학이 또다시 충돌하고 있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질법도 하다.

적어도 소비심리 위축이 지갑을 열지 않는 원인으로 지목된다면, (이유야 어떻든)고소득층보다는 중산층 이하의 소비심리가 훨씬 얼어붙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월평균 소득 400만원 이상 고소득자들은 6개월 뒤의 경기, 생활형편 등에 대한 기대심리 지수가 95.8로 지난 5월 이후 기준치 100밑으로 내려와 있다. 반면 소득 200만원이상∼300만원미만은 4월 한달 반짝 100을 넘어선 것 이외에는 일찌감치 100 미만으로 떨어졌다. '바람 불면 바람보다 먼저 눕는' 민초들인만큼 돈 주머니도 더 일찍, 단단히 닫혀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차 계열 3사의 내수가 상반기 21.6%감소하고 있는 사이 고가 외국산 승용차는 1∼6월 1만 1400대(39만648달러)가 수입돼 지난해 같은 기간(1만 100대)보다 13% 늘었다. 지난달에는 처음으로 점유율 3%대로 올라섰다. 신모델 출시를 앞둔 수요감소 등 요인도 없진 않겠지만, 근본적으로 고소득층의 경기에대한 소비탄력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그만큼 고소득층의 소비회복을 통한 내수부양 여지가 크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할수 있다.

경기 대한 민감도가 높은 대표적인 업종인 의류시장의 경우 국내 전체 의류시장은 2002년 24조원 규모에서 지난해 23조, 올해는 22조원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고가품 비중이 높은 수입의류의 경우 2002년 5조8000억원에서 2003년 8조5000억원, 올해는 10조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www.fashionbiz.com). 김성희 삼성패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IMF때는 중산층 이하가 중저가품으로 소비를 한단계 낮췄지만, 최근에는 이들이 아예 지갑을 닫고 있다"며 "반면 일정 소득이상 층이 소비하는 이른바 명품시장은 경기가 어느정도 변동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소비가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탄력성은 그렇다치고 고소득층의 소비규모 자체가 전체 경기를 이끌만큼 결정적인 것도 아니다. 도시근로자 가계수지 동향을 통해 소득별 소비지출점유율을 추정해보면 지난 1/4분기 기준으로 소득 상위20%의 월평균 소비지출은 전체 소비지출의 34.3%를 차지하고 있다. 상위 10%의 소비지출 점유율은 20.4%이다.(이 가운데 어느정도가 '내수'에 해당하는지 까지는 알수 없다). 흔히 상위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상위20%의 소비력까지 전체 소비의 80%에 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굳이 통계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업종·품목별로 최고가 품목의 소비시장 규모는 대략 5~10% 안팎이라는게 업계관계자들의 말이다. 기업(혹은 창업)할 때 고급품보다는 중산층 미만의 고른 수요가 있는 부문, 한마디로 '때묻은 푼돈'을 잡을 수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부총리의 말이 `오류`라고 반박할 생각은 없다. 부자들이 돈을 편하게 쓸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획일적 평등주의`가치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경제수장으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지적이다. 또 우리사회가 '정당한 부' '당당한 부자'에 대한 공감대를 지속적으로 넓혀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옳을 것이다.

단지 `부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부자 중심의 경제정책`은 다르다는 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가슴으로는 부자들에 대한 열린 마음을, 머리로는 중산층의 소비력을 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조화`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흰 지갑 검은 지갑 가릴 것 없이, 모두의 지갑을 열어야 우리 경제가 살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의 지갑, 중산층의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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