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법으로 처벌 어려워"…안희정 '무죄' 선고 이유는

머니투데이 이영민 기자 2018.08.1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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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재판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현행법상 성폭행 인정·피해자 심리 문제 고려 "현행법이 정의한 성폭행으로 보기 어려워"

여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안희정(53)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혐의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임성균 기자여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안희정(53)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혐의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임성균 기자


수행 비서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보기 힘들며 현행법이 정의한 성폭행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 조병구 판사는 피감독자 간음·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게 14일 무죄를 선고했다.



안 전 지사는 지난해 7월부터 7개월에 걸쳐 수행비서이자 정무비서였던 김지은씨(33)를 4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씨를 5차례 기습추행하고 1차례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추행한 혐의도 받았다.

검찰은 지난달 2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도지사와 수행비서라는 극도의 비대칭적 관계를 이용해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굴복시켜 간음한 중대 범죄”라며 안 전 지사에 징역 4년을 구형하고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이수와 신상정보 공개 고지 명령을 청구했다.



◇판단의 3가지 전제…보호법익·성폭행의 정의·성폭력 피해자의 특수성

재판부는 그러나 사건의 쟁점을 4가지로 설명하며 무죄를 선고했다. 쟁점은 △업무상 위력이 존재했는지 △위력을 행사했는지 △위력의 행사와 간음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그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가 발생했는지 여부 등이다.

그러면서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의 보호법익(어떤 법의 규정이 보호하려고 하는 이익)은 ‘성적 자기결정권’ △현행 법체계 하에서 죄형법주의 등 원칙에 기초한 해석과 판단 △성폭력 피해자로서 특수성 고려해 ‘성인지 감수성적 고려’ 등을 무죄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와 김씨의 위력 관계는 인정하나 안 전 지사가 위력을 상시적·일반적으로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력 정치인·도지사라는 지위와 그 비서의 관계는 위력에 해당한다”면서도 “피고인이 위력을 일반적으로 행사해 왔다거나 이를 남용해 ‘위력의 존재’ 자체로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볼만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개별 간음·추행 혐의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개별 사안에서 위력 행사 여부를 밝힐 주요하고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이 신빙하기 어렵고 증거가 부족하다는 판단이었다.

예컨대 재판부는 “강남 호텔 간음 건의 경우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씻고 오라’고 했는데 시간·장소·당시 상황·과거 간음 상황에 비추어 그 그 의미를 예측할 수 있음에도 별다른 반문이나 저항 없이 이에 응했다”고 말했다. 또 “스위스 호텔 간음 건도 전임 수행비서가 피해자에게 객실에 들어가지 말라는 조언을 했음에도 객실에 들어가 간음에 이르게 했다”고 말했다.

◇재판부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할 수 있던 피해자…현행법상 범행 인정 어려워”

재판부는 김씨의 신빙성 떨어지는 진술이나 태도를 성폭력 피해자에게 나타나는 심리상태 탓으로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기 위해 △김씨가 안 전 지사 운전비서의 행동을 성희롱이라고 문제제기한 것 △김씨가 중국 상화원 리조트에서 안 전 지사 부부 객실 문 앞에 있었던 사건 △김씨가 정무비서로 보직 변경 시 자주 눈물을 흘리고 괴로움을 호소한 점 등을 살펴봤다.

재판부는 “운전비서와 갈등상황에서 드러나다시피 피해자는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라며 “상화원 사건, 정무비서로 보직변경과 관련된 문제 등은 피해자의 해명 자체가 객관적 증거에 어긋나거나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각각의 강제추행 건도 무죄 판단이 나왔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신체접촉이 있었다고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해자 진술과 같이 업무상 상하관계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된 추행이라면 ‘기습추행’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모든 증거를 종합해 숙고하고 피해자 증언을 성인지 감수성적으로 고려해도 공소사실에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기초해 사안을 보더라도 이른바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이나 ‘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이 입법화되지 않은 현행 성폭력 범죄 처벌 법제 하에서는 피고인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NO Means No rule’이란 협박이나 위력의 행사와 같은 행위가 없더라도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Yes Means Yes rule’은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성관계로 나아가면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판부는 이 같은 처벌체계 도입 여부와 관련, “입법론적 문제이고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성문화와 성인식 변화가 수반돼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安 “국민 여러분께 죄송…다시 태어나도록 노력” 金 “부당 결과에 주저앉지 않겠다” 항소

선고 후 재판장을 나선 안 전 지사는 취재진을 만나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 부끄럽고 많은 실망을 드렸다”며 “다시 태어나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사법당국에 할 말 없느냐’는 질문에는 “다른 말씀은 못 드리겠다”며 법원을 떠났다.

김씨는 이날 판결에 불복하며 항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씨는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통해 밝힌 입장문에서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겠다”며 “침묵과 거짓으로 진실을 짓밟으려던 사람들과 피고인의 반성 없는 태도에 지독히도 아프고 괴로웠다”고 심경을 전했다.

아울러 “재판장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씀하실 때 결과는 예견됐을지 모르겠다”면서 “하지만 지금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약자가 당당히 끝까지 살아남아 범죄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초석이 되도록 힘을 낼 것”이라며 “끝까지 함께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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