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도 환상쇼로 만드는 '위선의 역사'…“트럼프는 우연히 나온 대통령이 아냐”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8.07.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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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 새책] ‘판타지랜드’…가짜가 진짜를 압도하는 500년의 이야기

거짓도 환상쇼로 만드는 '위선의 역사'…“트럼프는 우연히 나온 대통령이 아냐”


미국을 쉽게 표현하면 슈퍼맨과 배트맨의 나라다. 하나는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데 두 캐릭터 모두 가짜와 진짜 구분 없이 ‘실재’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라는 뜻이다.

저자가 지난 20년간 수많은 조사 결과를 분석하고 교차 검증했더니, 다른 나라에선 보이지 않는 신화와 환상, 거짓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가 상식 이상으로 높았다.



미국인 중 3분의 2는 천사와 악마가 진짜 이 세상에서 활약 중이라고 믿고, 절반은 인격신이 지배하는 천국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또 3분의 1은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4분의 1은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하고 전직 대통령이 적그리스도였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특정 분야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로 퍼져있다. 망상과 착각의 확산은 이제 ‘판타지랜드’ 미국의 일상에서 허구와 탈진실의 얼굴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가령 베스트셀러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대해 저자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소로의 오두막은 도시와 30분 거리일 뿐인데 마치 대자연을 즐기는 양 허세를 부린다는 자연주의자 존 뮤어의 말을 인용해 비판한다. 소로는 800일간 자연에 머물다 남은 평생을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저택에서 살았다. ‘월든’은 달콤한 면을 부각해 미국인의 가슴을 뛰게 하는 환상의 전형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

건국에 대한 신화는 더 가관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전기에 자신이 어린 시절 손도끼로 체리나무를 잘랐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한 일화, 참전한 밸리 포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 일화 모두 허구일 뿐이다.

과학의 ‘사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종교가 떨친 환상의 맹위는 교육 풍경에서도 이어졌다. 1980년대 불기 시작한 홈스쿨링을 하는 부모 3분의 2는 신앙과 맞지 않는 과학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이유로 이 제도를 선택했다.


TV는 판타지의 가장 자극적인 촉매제다. 골다공증과 에디슨병을 앓았던 존 F.케네디가 젊고 활기찬 사람으로 각색된 것이 시작이다. 1992년 빌 클린턴이 선글라스를 끼고 심야 토크쇼에 출연해 색소폰을 연주한 일은 “대통령 선거운동이 연예인 대표를 뽑는 오디션으로 진화한 기념비적 순간”으로 묘사됐다.

오프라 윈프리의 ‘공식 세례’를 받고 스타가 되는 현상 역시 TV 환상쇼가 연출하는 이미지인 셈.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암웨이, 월마트, 애플, 아마존 등은 경영에 종교적 색깔을 입히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다.

2000년에 접어들어 미국의 금융산업계는 위험한 부채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환상에 사로잡혔고, 수백 수천만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부유층처럼 살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저자가 보는 판타지랜드의 끝판왕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쇼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고 진정성만 꾸며낼 수 있다면 게임은 끝난다”는 핵심 규칙을 트럼프는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죄인 같은 그의 태도는 그가 경악스러울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라는 방증으로 수용된다.

팩트체크 전문기관이 트럼프의 400개 사실 진술을 검토한 결과 이 중 50%가 ‘완전히 틀린 말’이고 20%는 ‘거의 틀린 말’로 드러났다. 워싱턴포스트는 “대통령 당선 이후 트럼프는 하루 평균 4개 이상의 거짓말이나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보도했다.

판타지에 대한 미국의 집착은 신대륙 원정에서 시작됐다. 신세계로 건너온 많은 이민자는 ‘모든 개인은 무엇이든 각자 바라는 대로 믿어도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종교적 유토피아를 꿈꾸며 온 몽상가들이나 골드러시를 위해 온 현실론자 모두 극단적 개인주의에 기댄 것이다. 개인주의는 처음부터 영웅적인 환상과 연결됐다.

이를테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인 미국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맞춤식 유토피아를 건설하면서 상상력과 의지로 스스로 자유롭게 재창조한다는 식이었다. 미국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합리적이며 경험적인 부분을 뒤덮었다.

하느님과 자신이 내밀하게 소통한다고 주장하는 판타지랜드 미국인의 원형인 앤 허친슨은 광적인 신비주의를 설파했고, 하버드 출신 목사들은 인디언은 우리를 가로막는 악마의 무리라며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사실처럼 둔갑한 판타지는 수세기에 걸쳐 조금씩,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은 점점 더 빨리 미국인의 가슴에 파묻혔다.

저자는 “지금은 ‘사실이 무엇이냐’ 여부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믿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라며 “환상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판타지랜드의 광기를 막을 이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판타지랜드=커트 앤더슨 지음. 정혜윤 옮김. 세종서적 펴냄. 720쪽/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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