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 다루려면 현실 무대보다 더 논리적이어야"

머니투데이 김보영 SF작가 2017.09.26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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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 김보영 SF작가 심사평

"다른 세계 다루려면 현실 무대보다 더 논리적이어야"


<총평>

흔히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필력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점은 작가가 자신 안의 평범한 편견과 싸우는 것이다. 소설가가 대단한 철학가나 사상가일 필요는 없다. 평범한 사람이 흔히 갖는 평범한 편견과 차별의식을 넘어서기만 해도 한 인간으로서 할 일은 다 한 셈이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미 소수다. 흔한 편견과 차별의식이 SF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 인식에 맹점을 가진 채로 다른 세계를 펼치려 하면 모든 지점에서 아귀가 안 맞아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를 무대로 글을 쓰려는 사람은 현실을 무대로 쓰는 사람보다 더 논리적이어야 한다.

SF에는 또 다른 곤란한 편견이 있는데, 소설에 필요한 것이 과학적 지식이라 생각하기가 쉽다. SF는 문학이고 문학의 원칙이 적용된다. 잘 모르는 개념은 함부로 소설에 넣는 것이 아니다. 맥락 없이 과학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늘어놓은들 독자를 속일 수는 없다. 독자는 당신보다 영리하며, 독자를 두고 그런 승부를 하면 필히 진다. 하다못해 SF 심사위원은 더욱 속일 수 없다.



국적불명의 공간에서 국적불명의 사람들을 쓴다고 설득력이 생기지 않는다. 결국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을 고스란히 가진 인물을 그려내면서 그런 설정을 해 보았자 외국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설득력을 갖지 않는다. 외국의 문화를 깊이 공부한 것이 아니라면, 한국인이 없을 듯한 공간이라 해도 뻔뻔하게 한국인을 쓰는 게 차라리 낫다.

내게만 이런 작품이 몰렸는가, 혹은 한 사람이 여러 편을 냈는가 의문이 들었는데, 같은 의문을 다른 심사위원들도 했다는 점에 놀랐다. 주인공이 마땅한 근거 없이 욕설과 폭력을 남발하며, 자신의 울분과 분노를 약자에게 푸는 작품이 넘쳐났다. 그 울분을 강자와의 싸움이나 사회변혁에 쓰는 이야기는 찾기 어려웠다. 모든 가치판단을 지운다 한들 일단 심사위원이 지쳐서 좋은 평가를 할 수가 없다. 폭력적인 이야기를 쓸 때에는, 이것이 전복적인 상상이 아니라 누구나 하는 진부하고 흔한 상상이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작품이, 정갈하고 차분한 작품이 그 안에서 강해 보였고 빛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작품은 설령 지금은 미숙하더라도 다음을 기대하게 했다. 소설을 쓰는 자의 내면은 몇 번을 다시 정제해도 모자라다. 글을 쓰고자 하는 자는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쓰라.

<심사평>

◇장편=본심작 중 ‘러브슈프림 엔터테인먼트’는 문장과 이야기 구성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너무 흔한 이야기였다. 대상화한 이질적 존재에게 권리가 있는가, 인간인가, 영혼이 있는가 하는 논의는 프랑켄슈타인 이래로 무수히 반복된 이야기다. 더해서 사랑을 선문답으로 논하기엔 이미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빅션’의 노아의 방주 테마 역시 이미 무수히 반복된 이야기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려낸 점은 장점이었지만, 특정 종교들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전개의 의도가 모호했다.

‘몽이’는 일상의 풍경을 무난하게 잘 풀어낸 점이 좋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 어우러지지 못했고 시작과 결말의 충격적인 사건 역시 전체를 아우르지 못했다.

‘영원한 빛’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전개가 재미있었고, 로봇이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결말이 좋았다. 하지만 로봇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했고 캐릭터 간 구분 역시 모호했다. 괴물의 습격과 광산 일이 구체적인 묘사 없이 반복되며 전개가 늘어지는 점도 단점이었다.

본선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아세빈 도시동맹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작가가 상상하는 세계의 아름다운 원형이 엿보여 마음에 든 작품이다. 하지만 훈련이 많이 부족하다. 이야기는 훨씬 더 압축해야 하고, 세계관과 사건과 인물은 훨씬 분명해야 한다. 단지 계속 쓴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인 듯하여 격려하고 싶다.

‘에셔의 손’은 투고작 중 필력이 압도적인 작품이었고 몰입감도 상당했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전뇌’의 설정을 활용하는 방식은 훌륭하게 SF적이고 장르 이해도도 높았다. 장마다 이야기가 깊어, 짧은 시간 내에 구축한 작품은 아닐 거란 생각을 했다. 단지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1인칭을 쓰는 점에 혼선이 있으니 이 부분에서 퇴고가 필요해 보인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구분이 되지 않아 단편 연작이라 착각했을 정도였다. 인물 중 한 명이 좌절과 분노를 살인으로 풀어내는 지점은 이번 투고작의 전반적인 성향과 이어지는 점이 있어서 심사 당시에도 토론이 있었다. 작가로서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중단편=‘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는 간병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깊은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다. 단지 문장과 구성이 성근 편이었고, 의학적 생명연장의 모순을 파고들지 않은 채로 ‘환자가 죽어야 간병인이 산다’는 메시지는 위험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로그’는 사이버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상적인 자살의 풍경을 은은하게 그려냈다.

‘라디오 장례식’은 초반에 등장한 안드로이드의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고 인간의 이야기로 빠지면서 구성이 성글어지긴 했지만 소재와 분위기가 좋았다.

‘독립의 오단계’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지만 산만한 구성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지금보다 훨씬 더 압축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당선작들은 모두 자신만의 장점과 매력이 있었다. 단지 그들 중 다수가 죽음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점은, 결국 투고작의 전반적인 성향에서 이어지는 점이었기에 고민이 되었다.

우수상에 선정되었던 작품은 비과학을 과학으로 전환하는 SF의 유쾌한 변용으로서 좋은 예였으나 안타깝게도 이 공모전의 지원 자격에 맞지 않았다. 당신은 이미 작가이니 공모전의 문을 두드리기보다는 활동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건필을 기원한다.

중단편 대상으로 선정된 ‘관내분실’과 가작으로 선정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문장과 구성, 아이디어, 장르적 이해, 모두 탁월한 작품이었다. 신인이라 믿기 어려운 필력이 돋보였다.

‘우리가 빛의…….’ 는 대상인 본인 자신에게 밀렸고 다시 대상과 비슷한 분위기라는 점에서 우수상에서 밀렸지만, 여전히 빛나는 작품이다. 나중에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작가의 앞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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