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재즈 첫발 내디딘 나윤선 “녹음하고 '내가 미쳤다' 생각”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7.05.17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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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4년 만에 새 음반 낸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악보도 연습도 없이 ‘즉흥적 녹음’

19일 전세계 동시 발매된 9집 'She Moves On'에서 나윤선은 세련된 유럽 재즈에서 대중적인 미국 재즈로 첫발을 내디뎠다. 미국 재즈 특유의 리듬감인 '스윙'에 자신 없어했던 그는 이번 음반을 통해 일상으로 느끼는 재즈 고유의 특징을 가슴으로 느꼈다고 했다. /사진=나승열 작가<br>
19일 전세계 동시 발매된 9집 'She Moves On'에서 나윤선은 세련된 유럽 재즈에서 대중적인 미국 재즈로 첫발을 내디뎠다. 미국 재즈 특유의 리듬감인 '스윙'에 자신 없어했던 그는 이번 음반을 통해 일상으로 느끼는 재즈 고유의 특징을 가슴으로 느꼈다고 했다. /사진=나승열 작가


“나윤선 음반 맞나?” 이런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첫 곡 ‘트래블러’(Traveller)부터 마지막 곡 ‘이브닝 스타’(Evening Star)까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48)이 19일 4년 만에 전 세계 동시 발매한 새 음반 ‘쉬 무브즈 온’(She Moves On)의 수록곡들은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할 만큼 ‘파격’이고 ‘이탈’이었다.

자유로운 형식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유럽 스타일을 본질로 삼던 그의 재즈는 이 음반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통통 튀는 드럼이 이끄는 스윙 리듬을 따라 그의 보이스는 안착하듯 연주에 ‘스며’들고, 저음부터 고음까지 종횡무진 훑고 다니던 기교적 마술도 저음·중음의 따뜻한 표현력으로 대체됐다. 2분에서 8분까지 마치 ‘즉흥적’으로 뿌려놓은 듯한 각양각색의 곡들은 규칙에 저항하는 재즈의 본질을 읽고 있었다.



세련된 유럽 재즈의 언어에서 대중적인 미국 재즈 언어로 선회한 것은 나윤선 음악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이 도전은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됐다.

“4년간 쉼 없는 공연으로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쉬고 있다가 작년 11월쯤, 우연히 건반 주자인 제이미 샤프트의 음악을 듣게 됐어요. 아방가르드 음악만 하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어떤 음악에선 너무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멜로디를 구사하더라고요. 메일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음악적 범위가 매우 넓고 종일 프랭크 시나트라나 밥 딜런 같은 음악을 듣는 보컬 애호가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호감도가 더 상승했어요.”



나윤선은 앞뒤 가리지 않고 간단한 짐만 꾸려 그가 있는 뉴욕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연주자는 보통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데, 샤프트는 그런 개념이 확고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동질감’으로 엮였다.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4년 만에 발매된 새 음반에서 악보도 연습도 없이 즉흥적으로 노래를 녹음했다. 즉흥성을 담보로 하는, 재즈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녹여낸 음반인 셈. 그는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재즈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사진=나승열 작가<br>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4년 만에 발매된 새 음반에서 악보도 연습도 없이 즉흥적으로 노래를 녹음했다. 즉흥성을 담보로 하는, 재즈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녹여낸 음반인 셈. 그는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재즈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사진=나승열 작가
“음반 작업 함께해볼까?”라는 나윤선의 작은 요구에 샤프트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기타리스트 마크 리보, 노라 존스의 드러머 댄 리서, 뉴욕의 ‘핫’한 베이시스트 브래드 존스 등 ‘인기 스타’들을 단숨에 불러모았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연습과 준비를 끝낸 뒤에 ‘정식’으로 녹음하려던 나윤선의 계산된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뜻하지 않게 3주나 머물게 된 뉴욕에서 나윤선은 그들과 함께 명망 높은 뉴욕의 ‘시어사운드’에서 일사천리로 음반 한 장 뚝딱 완성해낸 것이다.

“샤프트 부부가 자신이 지은 곡을 핸드폰으로 녹음해 들고 와서는 바로 녹음하자는 거예요. 악보도 없고 연습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얼떨결에 녹음하긴 했는데, 하고 나서 ‘내가 미쳤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물었어요. ‘나는 3일 전부터 연습을 해야 하는 데, 무슨 노래인지 알고 녹음해야 하지 않느냐’고요. 그랬더니 ‘올림픽 선수들이 4년마다 경기한다고 해서 1주일 전부터 연습하니? 언제나 그 순간이 오면 그냥 하는 거야’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라고요.”


나윤선이 이때 절감한 건 이들에게 음악은 물과 공기 같다는 것이었다. 재즈를 학구적이거나 심각한 태도로 바라본 그에게 그들의 재즈는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윤선은 “이틀 녹음하는 동안 내내 들은 얘기가 ‘테이크 잇 이지, 맨’(Take it easy, man, 뭐가 걱정이야)”이라면서 “언제나 준비된 올림픽 선수 같은 이들을 보며 재즈를 처음 시작하던 1995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해 나윤선은 재즈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 재즈 스쿨 CIM에 입학한 그는 몰라서 더 열심히 했고, 가능성 하나에 숨겨진 재능까지 드러냈다. 스쿨 6년 차 때 그는 동양인 최초로 교수 제의를 받았고, 프랑스 보베 국립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그루브(groove·리듬감)나 스윙에 자신이 없어 미국 재즈를 등한시해온 그는 이번 3주간의 미국 음악 여행을 통해 95년 초심의 경험을 재생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나윤선은 25일부터 내년 4월까지 새음반 발매를 기념하는 전세계 투어가 예정돼 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미국 재즈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사진=나승열 작가<br>
나윤선은 25일부터 내년 4월까지 새음반 발매를 기념하는 전세계 투어가 예정돼 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미국 재즈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사진=나승열 작가
“3주간 한 거라곤 영어 공부한 게 기억의 전부인데, 연습이나 악보 없이 하는 음악의 가치를 새롭게 느낀 기회였어요. 또 미국 스윙은 오히려 흉내 내지 못해 더 표현할 것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죠.”

즉석에서 단 한 번의 녹음으로 끝낸 새 음반은 보컬과 연주자의 조화가 눈부시다. 기교 없는 보컬이라고 화려한 연주에 쉽게 묻히지 않고, 명성을 앞세운 연주자라고 보컬을 넘어서지 않는다. 나윤선의 자작곡인 ‘트래블러’는 미국 현지 재즈처럼 들리고, 폴 사이먼의 곡을 커버한 ‘쉬 무브즈 온’은 나윤선의 창작곡처럼 다가온다.

음반에 드리운 모든 것이 ‘처음’에 불과하지만, 명품 보컬은 어디에서도 그 그림자를 숨길 수 없는 듯했다. 이번 음반을 마치고 나윤선은 재즈에 더 집착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며 웃었다.

“최근 쿠바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관의 무대에서도 그렇고, 이번 음반 작업에서도 그렇고 재즈가 굉장히 민주적인 음악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어디서 온 인종이건, 배경이 무엇이든 모두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음악이 또 있을까 싶어요. 허비 행콕이든 나윤선이든 한 무대에 서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평등과 환희가 공존하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어요.”

공교롭게 한국에 민주주의의 새 기운이 불어닥칠 무렵, 나윤선은 25일부터 내년 4월까지 꽉 찬 세계 투어에서 음악으로 ‘민주주의’를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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