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부친 평생 모은 돈 날렸는데 증권사는 모른척…"

머니투데이 신희은 기자 2015.09.02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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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원' 투자가 '0원'으로…"노인층 피해 집중, 집단소송 검토"

"80대 부친 평생 모은 돈 날렸는데 증권사는 모른척…"


#1."80대 아버지는 이자 잘 주는 예금으로 알고 가입하셨어요. 은행으로 가겠다는 걸 직원이 '안전하다'고 매달리다시피 설득해서요. 이제 와서 한 푼도 돌려줄 수 없다니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하나요."

아들 김인철(가명·50대)씨는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께 집을 판 돈 4억원이 8년 만에 '휴지조각'이 됐다고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다. 88세의 아버지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잃은 충격으로 잘못될까봐 속앓이만 하고 있다.



김씨의 아버지는 2007년 3월 H증권 영업점 직원의 권유로 이율 7.6%의 채권 상품에 가입했다. '채권'의 개념도 몰랐지만 당시 5%대 은행 금리보다 높고 안전하다는 말에 돈을 건넸다. 아버지는 2009년 7월까지 꼬박꼬박 이자를 받았지만 이후 이율이 3%로 낮아졌고 올 4월 증권사는 원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2."명예퇴직 후 전세금으로 받은 돈 1억5000만원을 투자해 이자로 생활했어요. 직원이 다른 건 몰라도 '땅'이 있어서 안전하다고 몇 번을 강조했어요."



박종민(가명·67)씨는 세입자로부터 받은 전세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 밤잠이 오지 않는다. 아내와 딸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다.

박씨는 H증권 직원의 안내대로 서명란에 사인했지만 '원금 손실 우려'에 대해선 한 마디도 들은 기억이 없다. "전세금인데 안전하냐"는 질문에 직원은 거듭 "믿고 맡기라"고 장담했다. 박씨는 올 4월 원금을 줄 수 없다는 안내를 보낸 증권사에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믿으라"던 직원은 "억울하면 소송하라"며 태도를 바꿨다.

박씨는 "뒤늦게 알아보니 대부분 상품이 이런 식으로 판매되고 나중에 사고가 나면 투자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 식이더라"며 "호소할 데도, 보호해주는 곳도 없고 소송을 하려면 수백~수천만원의 비용 부담을 또 다시 감수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80대 부친 평생 모은 돈 날렸는데 증권사는 모른척…"
시중은행보다 높은 이자에 예금처럼 안전하다는 창구 직원의 말을 믿고 노후자금을 맡겼던 60대 이상 고령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과거 관행처럼 이뤄지던 '불완전판매'의 피해가 사회적 약자인 고령 투자자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진 형국이다.

고령 투자자들은 원금 손실의 위험을 제대로 안내받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판매한 H증권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금융감독당국도 투자자들이 원금손실 위험을 언급한 문구가 있는 상품 가입서류에 직접 사인했다면 불완전판매를 입증할 수 있는 녹취록 등의 다른 증거 없이는 증권사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7년 H증권 트레져씨티ABS(유동화증권)에 투자했다 원금을 잃고 당국에 불완전판매 등 민원을 제기한 투자자는 40여명에 이른다. 대부분 억대 손해를 봤다. 상당수가 60세 이상, 70~80대 고령으로 한 투자자는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ABS는 부동산 등 유동화자산을 기초로 발행된 증권이다. 트레져씨티ABS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 금리 7.6%에 3년 만기로 450억원 규모가 발행됐다. 서울 흥인동에 주상복합건물을 짓기 위한 자금조달 용도로 당시 시공사였던 신성건설이 지급보증을 섰고 신용등급은 'BBB-' 수준이었다.

이 ABS는 발행 대표주관사였던 H증권을 통해 490여명(295억원 규모)의 개인 투자자에게 팔려나갔다. 이듬해인 2008년 11월 금융위기와 부동산 침체로 신성건설이 부도가 났고 2009년 8월 두산중공업이 시공사로 재선정됐다.

은행 추가차입 과정에서 신규 대출분이 상환의 선순위가 되면서 2순위였던 개인투자자들은 3순위로 밀려났다. 이율도 3%로 조정됐고 2010년 1월이었던 만기는 올해 3월31일까지 연장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말 건물이 완공됐지만 미분양으로 자금회수가 저조해 후순위 개인투자자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게 됐다.

H증권 측은 해당 상품 손실에 대해 "공식답변을 드리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금융감독당국은 원금 손실 위험이 높은 상품이 고령 투자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판매된 당시 상황은 인정했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국 관계자는 "이 상품 판매 당시 부동산PF(프로젝트파이낸싱) 관련 투자가 일반화돼 있었고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가입하는 쏠림 현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만 "금융사에 불완전판매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라고 압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금융상품 불완전판매 관련 입증책임을 판매사가 지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이 국회에서 수년째 미뤄지는 사이 선의의 투자자들이 이런 피해를 입고 있다"며 "실적을 올리기 위해 상품 위험을 축소해 판매하고, 손실이 나면 투자자가 모든 피해를 떠안는 구조는 고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네이버 카페 '트레져씨티ABS 피해자의 모임' 운영자는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고령의 노인들이 피해를 본 사례가 너무 많아 집단 소송을 추진하는 등 끝까지 할 수 있는 대응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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