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tvN에서 방송된 토일드라마 ‘정년이’의 10회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지막 대목에서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이날 방송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잃었다고 생각하고 낙향한 윤정년(김태리) 앞에서 엄마 서용례(문소리)는 ‘심청가’의 한 대목인 ‘추월만정(秋月滿庭)’을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이른바 ‘떡목’으로도 명창이 될 길은 충분히 있다며, 국극으로 돌아가려하는 딸을 앞에 놓은 어머니의 한 맺힌 소리는 쓸쓸한 가을바다와 어우러져 이세계의 심상을 자아냈다.
이렇듯 치열하게 세공된 연기는 잠시나마 한 사람 인생의 호흡을 앗아가곤 한다. 매체는 많고, 작품은 잦은 시대. 진정 연기가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 함은 바로 언뜻언뜻 나오는 이러한 장면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한다. 연기는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 비롯된다. 따라서 잘 세공된 연기는 그 연기 자체를 벼리는 사람의 치열함에서 비롯된다. 데뷔한 지 24년,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그 작업을 전혀 멈출 수 없는 열정을 우리는 배우 문소리에게서 발견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문소리를 본래의 영화판이 아니라 안방극장에서도 많이 볼 수 있게 됐다. 2021년 코로나19 시절이 한창이던 때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 나온 이후 그의 행보는 TV로도 보폭을 넓혔다. 물론 영화계가 갈수록 줄어드는 투자로 위축되고, 그에 비해 OTT를 앞세운 뉴미디어가 활황인 탓도 있다. 하지만 문소리에게는 그러한 부분이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영화에서 보여줬던 연기로도 반짝이던 시간을 드라마 형식에서도 보일 수 있는지의 여부가 문제였다.
문소리는 2022년 넷플릭스 영화 ‘서울대작전’에 출연한 이후, 어느 때보다 긴 시간을 안방에서 다졌다. 지난해 넷플릭스 ‘퀸메이커’를 시작으로 디즈니플러스의 ‘레이스’에 출연했고, 2024년 11월 현재에는 tvN ‘정년이’와 함께 넷플릭스의 ‘지옥 2’에도 출연 중이다. 그리고 내년 작품 역시 넷플릭스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로 골랐다. 과일이나 채소로 따지면 문소리의 올해 제철은 늦가을인 지금인 셈이다.
따지고 보니 그는 최근 연극도 하나 뿌듯한 마음으로 마쳤다. 지난달 27일 막을 내린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에서 문소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예일대 교수 벨라로 분했다. 물론 내면의 고독함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갑자기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마음이 흔들리는 인물이었다.
차근차근 대사와 몸짓을 쌓아 연기를 다듬을 수 있는 연극을 통해 그는 자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정년이’에서는 윤정년과 윤정자(오경화) 자매를 홀로 키웠던 엄마 서용례로 분했다. 정년과 함께 바닷가에 풍화된 듯한 검은 피부를 가진 그는 알고 보니 판소리를 수련했던 채공선으로서의 과거가 있었다. 예술을 다루는 작품에는 꼭 하나 정도 있을 법한,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도 주인공의 열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어른 캐릭터를 연기한 문소리는 때로는 정년의 가도를 가로막다가도, 그의 성장을 간곡히 기대하다가도, 지금은 정년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주는 인물로 변모했다. ‘추월만정’은 그 여정으로 떠나는 출정가와도 같았다.
반면, ‘지옥 2’에서는 정무수석 이수경으로 분한다. 늘 텀블러를 곁에 끼고 다니는 그는 ‘고지(죽음의 예고)’와 ‘시연(지옥의 사자들이 실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난무하는 ‘지옥’의 세계관에서 그나마 혼돈 속에 질서를 설치하려 한다. 결국 온건하지만 고여 버린 종교단체 ‘새진리회’와 순수하지만 급진적이고 폭력적이기 그지없는 패거리 ‘화살촉’ 그리고 이들을 구하려고 하지만 내부 모순에 빠진 ‘소도’ 등을 정교하게 조종하려 한다.
그의 분량은 제작진이 말하는 특별출연의 범주는 애저녁에 넘었다. 각 단체의 리더들과 수시로 논리를 겨루면서 극의 후반부 대부흥회 장면을 지배하려다 오히려 스스로 혼돈에 빠지는 그의 모습은, 판타지물이라기 보다는 정치물로 변한 ‘지옥 2’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으로 남았다.
과거 그의 모습을 ‘박하사탕’의 순임, ‘오아시스’의 공주로 기억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우생순’의 미숙, ‘바람난 가족’의 호정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로 바뀌었다. 이는 다시 ‘관능의 법칙’ 미연에 ‘리틀 포레스트’의 ‘김태리 엄마’로 바뀌었지만, 그 세월 속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문소리는 항상 대중의 기대를 일관되게 충족해옴과 동시에 때때로는 그 기대치를 아득히 넘어서는 연기의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처음 드라마에 도전하던 시절 ‘태왕사신기’의 가진이나 ‘내 인생의 황금기’ 이황의 경우는 드라마의 형식에 연착륙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치 바다를 바라보며 스스로의 한을 탓하지도, 파도에 씻겨 내려간 꿈을 탓하지도 않는 용례의 모습처럼, 문소리의 연기는 어느새 플랫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그 깊이와 점도, 밀도에서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한없이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와중에도 연극을 통해 자신의 연기를 해체하고 재설계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10일 노래한 ‘추월만정’은 한글로 풀어보면 ‘가을 달이 뜰 안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마치 가을날 그의 연기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문소리의 연기가 주는 충만함이 가슴 가득 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추월만정’의 여운을 남기며, 문소리는 하나의 기대감의 뿌듯함을 우리 가슴 언저리에 더해놓고 또다시 세월을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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