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협약이 아직 발효되지 않아서… 대외비입니다."
지난 3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는 한국이 2025년에 유럽 최대 규모 국제공동 R&D(연구·개발) 프로그램 '호라이즌 유럽(Hozion Europe)'에 준회원국으로 가입한다고 밝혔다. 준회원국이 되면 약 78조원에 이르는 호라이즌 유럽 '필라2(Pillar Ⅱ)' 사업의 연구 과제를 한국 연구자가 직접 기획해 주도할 수 있게 된다.
호라이즌 유럽의 재정은 회원국의 주머니에서 각출한 재정 분담금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마침 국내에선 과학기술 R&D 예산 감축의 여파가 시작된 때였다. 동시에 정부는 "글로벌 R&D를 전격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기자들의 관심은 정부가 호라이즌 유럽에 얼마만큼의 분담금을 내겠다고 나설지에 쏠려있었다. 과기정통부는 "국가 간 협약이라 협상이 완료되는 올해 연말까지 분담금 규모를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최종 서명 전 협약의 상세 내용이 유출될 경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기밀'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슬쩍 공개됐다. 지난 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올라온 '2025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검토보고서'다. 문제는 주관 부처인 과기정통부도, 보고서를 올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하 예결위)도 이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안정보시스템은 국민 누구나(국민이 아니어도) 자유롭게 내려받아 의안 원문을 확인할 수 있는 누리집이다. 검토보고서에는 과기정통부가 제출한 2025년도 예산안의 상세 내역이 공개됐고, 그중엔 '유럽연합 다자연구혁신프로그램 참여 지원(R&D)' 예산도 있었다.
특이점도 있었다. 해당 예산안에는 상세 금액과 함께 '(대외 비공개)'라는 문구가 기재돼 있었다. 기밀이라던 정보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개 문서에 버젓이 쓰여 있는데, 동시에 '대외비'이기도 했다. 두 문구 중 하나는 없어야 했다.
"OOO백만원, 이게 호라이즌 유럽 분담금이냐"고 과기정통부 고위급에 확인하자,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액수가 지금 예결위 검토보고서에 공개돼 있다"고 언급하자 "그런 게(검토보고서가)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사정은 이렇다. 국회 예산 심사를 앞둔 과기정통부는 호라이즌 유럽의 협약이 아직 진행 중이고 최종 서명을 남겨둔 상황이라 상세 예산을 공개할 수 없다며 국회에 사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회는 국회대로 정부 예산을 샅샅이 검토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에 과기정통부는 예산안을 제출했고, 예결위는 예산안을 검토한 뒤 검토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결위 담당자가 대외비 처리해야 할 금액을 지우지 않은 채 의안 시스템에 업로드했다.
기자는 예결위에서 해당 문건을 작성한 담당자에게 사유를 밝히고 연락을 재차 시도했지만 답하지 않았다. 이어 과기정통부에 "문서가 공개됐다고 알려줘도 하룻동안 그대로 둘 정도면, 기밀이 아닌 것 아니냐"고 묻자 그제서야 "그렇지 않다. 예결위에 문건을 수정해달라 요청해보겠다"고 답했다. 이 과정에만 몇 시간이 소요됐다.
현재 문제의 그 검토보고서는 금액을 비공개 처리한 새 버전으로 올라와 있다. 당초 올해 연말까지 완료할 예정이었던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을 위한 최종 서명일은 아직 미정이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