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봐요, 11월인데 반소매 옷 입고 다니잖아. 원래 이맘때는 저런 옷 못 입어요."
지난 7일 제주 서귀포시의 한 부두 앞에서 만난 도민은 눈앞을 지나던 관광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흰색 반소매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채 일행과 산책하고 있었다.
이날 서귀포시의 낮 최고온도는 섭씨 21.5도.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었지만 지난해 여름 평균 기온인 24.7도와 불과 3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제주시는 올해 10월까지 낮 최고 기온이 31.3도에 달했다.
이같은 고온 현상은 제주 경제에 악몽이다. 농작물 생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제주 바다 역시 언제든 해산물을 넉넉하게 내어주던 풍요로움을 잃었다.
━
열과로 열매 다 떨어진 귤나무…남은 귤은 초록빛 가득 ━
제주 서귀포 성산읍의 한 시설농장에서 만난 강모씨(78)는 껍질이 터진 채 썩어 가지에 붙어있는 레드향을 손으로 따내며 "제주에서 태어나 50여년째 귤 농장을 운영하는데 올해 열과 피해가 가장 크다"고 밝혔다.
열과 피해란 고온을 견디지 못한 귤껍질이 터져 열매 안이 썩어들어가는 현상을 뜻한다. 귤을 재배할 때 열과 피해가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지만 이번 여름은 피해 규모가 남달랐다.
강씨의 농장은 약 3300㎡(1000평) 규모로 레드향과 국내 육성 한라봉 품종인 써니트를 재배한다. 강씨 농장도 지난 8월20일 이후 귤 약 70~80%를 열과 피해로 버려야 했다. 상한 귤을 수거해 담은 20리터(ℓ) 들이 플라스틱 통만 200개에 달했다.
귤 재배를 위해 적합한 하우스 내부 온도는 25도지만 이번 여름은 45도까지 올랐다. 설상가상으로 무더위가 10월까지 이어졌다.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따르면 올해 제주의 9월 평균 기온은 27.4도를 기록했다. 1973년 이후 가장 더운 9월이었다.
강씨는 "하우스 내부 온도가 33도를 넘어가면 숨이 턱턱 막혀 들어올 수가 없다"며 "보통 귤나무 한 그루에 15~20㎏의 귤이 열리는데 지금은 한 그루당 1㎏ 정도 남은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강씨는 2년 전 하우스 내부 곳곳에 더위를 식히기 위한 선풍기를 설치했다. 여름 내내 선풍기를 가동해 내부 온도를 3도 정도 낮췄지만 미리 장비를 설치하지 못한 다른 농장은 더 큰 피해를 보았다고 했다.
그는 "친구도 인근에서 귤 농장을 하는데 거긴 남는 게 없이 다 떨어져 가지에 접붙임을 해 품종을 바꿨다"고 말했다.
껍질이 얇은 레드향이 써니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볕을 가장 많이 받는 나무 윗부분은 열매가 다 떨어진 채 푸른 잎만 무성했다. 아래에는 노랗게 익지 못한 초록색 귤이 대부분이었다.
수확 시기도 한달가량 늦어졌다. 강씨는 "보통 9월이면 열과 피해가 없는데 11월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며 "예년 같으면 12월쯤 출하하는데 산과 당도는 맞추더라도 상품성을 위해 껍질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1월쯤 돼야 수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강씨는 "사과는 대구가 유명했는데 이제 강원에서 재배하지 않나. 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아버지 때부터 계속 귤을 재배했는데 점차 다른 과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
"바다가 육지같이 '휑~' 함서"…지난해 5만2000㎏ 수확한 뿔소라, 올해는 절반 수준━
바다도 푸르른 겉모습과 달리 이상고온으로 해초류가 자취를 감춰 어획량이 급감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서는 지난 8일 채취 금지기가 끝난 후 해녀와 해남들이 첫 작업에 나섰다. 보통 어장 관리를 위해 6월1일부터 8월30일까지 뿔소라 등 해산물 채취가 금지되고 10월부터 첫 작업을 시작하는데 수온 때문에 한 달 정도 조업이 늦어졌다.
사계리 어촌계장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지 않을 때 물질을 할 수 있어 보름마다 3~5일씩 작업할 수 있다"며 "올해는 수온이 높고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작업을 제 때 시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작업을 마치고 복귀한 해녀들은 "오늘도 바닷속이 휑했다"고 입을 모았다. 한 해녀는 "오늘 30㎏ 정도 수확했는데 봄까지 있던 미역과 감태도 모두 사라졌다"고 밝혔다. 이어 "해녀들은 이걸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앞으로 수온이 계속 오를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17살부터 해녀로 활동했다는 김모씨(80)는 "요즘 바닷속은 육지와 다름없다"며 "수온이 높아 해초류가 썩은 뒤 물에 쓸려 사라졌다"고 했다.
김씨 옆에 있던 또 다른 해녀는 "뿔소라는 해초를 먹고 자라 해초 사이에서 채취한다"며 "해초가 사라져버렸으니 뿔소라가 비쩍 마르거나 많이 죽었다"고 했다.
수협 관계자는 "사계리는 어장 관리가 잘 돼서 수확량이 많은 편인데 제주 전반적으로 지난해보다 수확량이 줄었다"며 "수출용으로 물량을 맞춰야 하는데 정해진 물량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계리 어촌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사계리에서는 뿔소라 52톤(t)을 수확했다. 올해는 작업할 수 있는 기간이 3번 정도 남았지만 21.3t을 수확하는 데 그쳤다.
관계자는 "올해는 비가 많이 오는 등 날씨가 안 좋고 높아진 수온으로 개체수가 줄어 추가 작업을 하더라도 지난해 수확량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