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가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소식을 접한 직후다. 그는 지난 수년 동안 미국의 제재로 중국 반도체 산업 발전이 비교적 늦어졌고,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이런 흐름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봤다.
EUV 노광장비 수출 제한은 여러 제재 사례 중 하나다. 2017년 출범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본격화한 중국 제재는 2021년 문을 연 바이든 행정부로 이어졌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동안 중국 화웨이, SMIC 등이 거래 제한 목록에 올랐고 중국으로의 기술·장비 수출 제한은 꾸준히 강화됐다.
놀랍게도 중국은 버텨냈다. 버텨냈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D램 시장에선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 낸드플래시 시장에선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스(YMTC)가 급격하게 점유율을 늘렸다. '메모리 최강자'로 군림해 온 한국 기업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3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중국의 위협'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삼성전자는 3분기 메모리 실적 관련 "중국 시장 내 레거시(범용) 제품 공급 증가로 수급에도 일부 영향이 있다"고 했다. SK하이닉스는 "중국 메모리 공급사의 공급 증가로 DDR4나 LPDDR4 같은 레거시 제품 시장은 경쟁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두 기업이 언급했듯 중국 기업은 아직 레거시 제품 중심이다. 고부가 제품에선 우리 기업과 여전히 격차가 크다. 중국 반도체 기업은 내수 시장 기반이라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EUV 노광장비와 같은 첨단 장비 수출 통제가 없었다면 레거시뿐 아니라 고부가 제품 시장에서도 빠르게 따라 왔을 것이다. "아찔하다"는 반도체 업계 관계자 말이 공감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제재 강화가 예상되는 트럼프의 재집권은 우리 반도체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업계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반도체 보조금을 축소할 우려가 있다"면서도 "중국 제재 강화로 우리 기업이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물론 미국의 어떤 제재에도 중국의 추격은 계속될 것이다. 미국의 제재는 그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만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 기업이 얼마나 고부가 반도체 개발·양산에 공을 들여 기술 격차를 벌려 놓느냐가 관건이다.
잊지 말아야 할 당연한 사실은 미국의 중국 제재가 결코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기업이 받는 반사이익이 지나치게 커지거나, 자칫 미국이나 미국기업의 이해와 상충한다면 언제든 미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과 '반도체 동맹' 강화 필요성이 거론되는 이유다. 이런 리스크는 기업 혼자서 해소할 수 없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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