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10시쯤 서울 중구 충무로 인쇄 골목. 이곳에서 20년 넘게 달력 인쇄소를 운영한 김모씨는 돋보기 안경을 쓰고 통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는 "작년보다 매출이 20% 줄었다"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11월은 신년 달력과 다이어리를 찍어내는 가장 바쁜 시기다. 과거엔 한창 인쇄물을 찍어낼 시간이었지만 김씨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그는 "10년 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없다"며 "주변 인쇄소도 20~30%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인쇄 상업 단지로 불리던 '충무로 인쇄 골목'이 불황을 겪고 있다. 골목 곳곳에는 '폐업' '임대' 등이 적힌 가게가 즐비했다. '캘린더 전문' 간판을 내건 업체들은 소량의 달력 주문 물량만 찍어내고 있었다.
━
기획실, 인쇄소, 후가공 업체… 충무로 인쇄골목의 구조 ━
충무로 인쇄 골목은 초창기부터 기획, 인쇄, 후가공 등 단계별 업체들이 입주했다. 기획실은 물량을 한꺼번에 받고 도안을 만든 뒤 주변 인쇄소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작은 규모 영세업자들은 도안사를 두기 어려워 기획실이 등장했다.
후가공 업체는 완성된 인쇄물을 코팅, 형압, 도무송, 접착하는 일을 한다. 형압은 로고 디자인에 압력을 가해 글자를 도출하는 것을 말한다. 도무송은 목형을 이용해 인쇄물을 원하는 모양으로 오려내는 작업이다.
달력의 경우 기획실이 도안을 제작하면 인쇄소에서 물량을 찍어내고 후가공 업체가 마무리한다. 벽걸이 달력은 윗부분에 철을 박고 탁상용은 구멍을 뚫어 스프링을 건 뒤에 납품한다.
━
디지털 발전에 경기 불황까지… 인쇄 골목, 달력 주문 왜 사라졌나━
과거 충무로 인쇄 골목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수도권과 지방 인쇄 물량까지 책임졌다.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술이 점차 종이를 대체했고 2000년 중반을 기점으로 인쇄업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여기에 여러 잉크로 다양한 도안을 찍어내는 합판 인쇄까지 생겨나면서 잉크 하나로 한가지 도안을 찍어내던 독판 방식의 업체들도 사라지게 됐다.
인쇄업자들은 오랜 불황에도 연말에는 바쁘게 일했다. 신년 달력이나 다이어리 등 반짝 주문량을 소화하기 위해서다. 은행, 병원, 약국, 식당은 달력이 돈을 불러 모은다며 수백부씨 주문을 했다.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인쇄업자들은 경기 불황으로 식당 소상공인들의 달력 주문이 크게 줄었다고 했다. 인쇄업자 A씨는 "작년까지는 그럭저럭했는데 올해는 물량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40년 넘게 이곳에서 인쇄업을 운영한 차모씨도 "전반적으로 달력 물량이 3분의 1 줄었다"고 했다.
━
"그래도 충무로 필요해" 인쇄업자들 못 떠나는 이유━
인쇄업자들이 계속되는 불황 속에서도 충무로를 떠나지 못하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이곳 업체들 중 상당수가 경기 파주에 인쇄 공장을 두고 충무로에도 사무실을 뒀다. 파주는 임대료가 저렴하고 옆 공장과 협업도 가능하지만 소비자들의 접근성이 낮다.
인쇄업 사무소를 운영하는 김모씨 역시 20년 동안 충무로를 지켰다. 그는 "파주에 공장을 짓더라도 사무실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며 "고객을 관리하고 영업하려면 인쇄업자들에게 여전히 충무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곳에 '라벨 전문' '접착 전문' '정합 전문' '지공 전문' 등 업체들이 모인 것도 이점이다. 후가공 업체를 운영하는 한모씨는 "한 공장 안에 많은 기계를 두기 어렵다"며 "이 바닥은 각자 한 분야를 파고 들고 다같이 먹고 사는 구조"라고 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