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마음의 고통이 심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웃이 이렇게 많은데도 국민 대다수가 무감각하다는 점을 이보다 더 무섭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작년에도 자살 사망자 수는 1만3978명으로 전년 대비 1072명이나 증가했다. 매주 이태원 참사의 사망자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대한민국 국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필자가 미국 유학 시절 심리상담을 처음 배울 때 지도교수는 우울증을 종종 '영혼의 흔한 감기'라고 부르곤 했다. 감기는 죽을병은 아니지만 대신 자신의 면역 체계가 약해졌다는 걸 알려주는 순기능을 한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잘 먹고 잘 자면 저절로 낫는 게 감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감기약을 먹으면 일주일 만에 낫고 안 먹으면 7일 만에 낫는다'는 농담도 종종 한다.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항우울제를 먹는 게 능사는 아니란 얘기다. '영혼의 감기' 우울증은 마음의 면역상태가 약해졌음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므로 초기에 마음의 면역상태를 속히 회복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 때 심리상담을 통한 비(非)의료 서비스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울증을 무조건 자살이나 죽음으로 가는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이유다.
우리나라의 정신건강 체계의 문제점을 짚어낸 OECD 보고서가 이미 10년 전에 나왔다. 2013년 한국을 방문한 OECD 정신건강 자문관 수잔 오코너 박사는 한국의 정신건강 체계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정책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대부분의 치료가 중증 입원 치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고, 각종 정신건강 관련 대책 또한 부처별로 산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효율성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전 국민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선 범부처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늘상 보고서는 언론 보도로 끝이 나고 정부 차원의 전 국민을 위한 가시적인 노력은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 때부터 비의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정신건강을 돌보는 전문가들을 '마음건강' 전문가라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윤석열 정부는 국민의 정신건강 정책을 대전환하는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비의료 마음건강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다. 청년 건강검진을 2년 마다 시행하고, 지난 7월부터 심리상담을 총 8회 제공하는 '전 국민 마음투자 사업'을 시행한 것이다. 해외 전문가들이 그렇게 목청 높여 강조해 온 전 국민을 위한 심리지원 서비스를 전개하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10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전 국민을 위한 심리상담 사업은 전면 실시 4개월 만에 존폐 위기를 맞았다. 김건희 여사가 관심을 기울인 사업이라는 이유로 주요 삭감 대상으로 꼽혔다. 필자는 대통령의 부인이 전 국민의 정신건강 문제에 얼마나 애끓는 관심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10년 넘게 비의료 상담서비스의 제도화를 목 터지게 주장해 온 나 같은 마음건강 전문가의 심장은 4달 만에 또 다시 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법령에 근거를 둔 예타 면제 조항을 꼭 대통령 부인 때문이라 여겨 폐지하려 한다면, 우린 또 다시 2003년 '자살공화국' 오명의 원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퇴행을 감행하는 정치적 우를 범할 것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해외 전문가들이 국가 존망이 달렸다는 정신건강 문제를 정치적인 색안경으로 속단하지 말아주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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