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만들어낸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반도체가 활용됐다. 금융·기술·산업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반도체 위에서 미국의 자산과 정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한국은 이 시스템과 연계해 빠르게 정보를 전송하고 연산 작업을 보조하는 '메모리'와 같은 위치에 있다. 글로벌 시스템의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하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트럼프 1기 때는 미국이 대중국 반도체장비 금수조치를 하면서 한국을 추격하던 중국의 발목을 잡았고, 이로 인해 한국은 어부지리의 이득을 취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 후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도 미국 정부는 트럼프 1기 때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었다. 반도체 패권이 세계경제 패권의 핵심이라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 등은 반도체 경쟁력 확보에 열을 올려왔다.
세상을 움직이는 반도체의 발전은 '무어의 법칙'(Moore's Law: 18~24개월마다 반도체 집적도는 두 배가 된다)을 실현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은 기술적 한계에 직면해 현재 기술력으로는 더 작게 만들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칩을 수직으로 쌓아 집적도를 높이는 3차원(3D) 고대역메모리(HBM: High Bandwidth Memory)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아왔으나, 미국의 자국 반도체 산업 우선주의와 중국의 추격으로 더 이상 칩의 크기만을 줄이는 과거의 전략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워졌다.
세계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은 인텔·마이크론과 같은 자국 반도체 기업들의 위기를 방치하지 않고, 막대한 직접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도 창신메모리(CXMT)와 양쯔메모리테크놀러지(YMTC) 등 자국 D램 업체들에게 모든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 이미 범용 D램 시장은 2~3년안에 중국에게 추격당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0년간은 삼성전자를 필두로 해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국제사회에서 핵심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넛 크래커(호두까기 기계) 사이에 낀 호두의 상황이다.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추격 사이에서 기술적 독립과 혁신을 이루지 않으면 망할 처지에 놓였다.
미·중 양국이 자국기업의 인프라 구축과 세제 혜택 등에 전방위적으로 힘을 쏟는데 우리나라는 대기업에 대한 반감과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서 오히려 규제와 비용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최근 한국전력의 적자를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쉽고 편한' 산업용 전기요금을 인상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매년 약 3조~4조 원에 달하는 전기료를 지불하고 있는데, 산업용 전기료를 10% 인상하면 3000억~4000억원의 비용부담이 늘고 이는 국제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 또 상법개정안 등을 통해 기업에 대한 규제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업 스스로의 노력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전폭적인 정부 지원이 필수적이다. 전기료 인하, 규제 완화, 연구개발(R&D) 지원 등의 대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반도체코리아의 글로벌 위상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21세기 반도체 산업은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좌우하는 핵심 축이다. 미국의 새로운 리더십 교체시기에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과 함께 정치권과 정부가 이제는 진정한 지원자로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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