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 해외 전시장에서 만난 국내 톱 전자 기업의 임원이 한 말이다. 생산직 근로자들의 근무시간에 초점을 맞춘 얘기가 아니다. 중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들을 값싼 노동력뿐만 아니라 기술력으로도 바짝 쫓아오고 있는 현상에 관해 취재진이 질문하자 이같은 답을 솔직하게 내놓은 것이다. 그는 "R&D(연구개발)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뭘 좀 진득하게 하려고 해도 52시간제가 발목을 잡는다"고 답했다. 연속성이 떨어져 기술 개발 속도가 늦춰진다는 얘기다.
4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에 더해 가전과 자동차 등 한국 기업들이 전세계 기업들과 경쟁 중인 산업의 노동시간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주 52시간이라는 경직된 근로시간을 유지할 경우 점차 치열해지는 글로벌 첨단 기술개발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가 지난해 발표한 산업기술수준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기술력은 미국보다 0.9년 뒤처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가별 패권 경쟁이 가장 치열한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 수준은 최고 기술국인 미국의 100점 대비 86점에 그쳤다. 유럽(90.9)과 일본(88.8)보다도 낮았다.
높은 기술 수준을 기록한 해외 주요 선진국은 근로시간 규제에 더해 근로 유연성을 강화하는 제도도 함께 실행하고 있다. 미국은 주당 최대 근로시간 제한이 없다. 일주일에 주 40시간 이상 일하면 추가 근로시간에 대해선 정규 임금의 최소 1.5배 임금을 받는다. '화이트 칼라(사무직) 면제(Exemption)' 제도는 고위관리직과 전문직 등에 해당하면서 주 684달러 이상을 버는 고소득 근로자를 근로시간 규제에서 제외하는 제도다.
일본도 이와 비슷한 '고도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의 제도를 2018년부터 시행 중이다. 신상품 연구개발, 애널리스트 등 생산직이 아닌 사무직 근로자 중 연 1075만엔 이상의 고소득자는 근로시간 규제에서 제외한다. 독일은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통해 주나 월 단위 근로시간을 노사가 합의해 정하고, 근로시간 규제보다 더 많이 일한 경우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이를 추후에 수당으로 받거나 휴가로 쓸 수 있도록 유연화했다.
한국 기업을 무섭게 뒤쫓고 있는 중국의 경우 하루 근로시간을 8시간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문화된 상황이다.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 IT기업계는 주 6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하는 '996' 관행이 굳어진 상황이다. 첨단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기술 발전에 중국이 사활을 걸면서 정부가 초과 근무를 용인한 탓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 4월 발표한 '기업이 22대 국회에 바라는 입법방향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은 '저출산 고령화 대책'과 '차세대 성장동력 육성'에 이어 세번째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우선 과제로 꼽았다. 고용노동부의 지난해 조사에서 국민의 54.9%가 "주 52시간제가 업종과 직종별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기 어렵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에 일각에선 현재 국회에서 발의된 '반도체 특별법'에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시간 규제를 풀어주는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해당 조항이 더해질 경우 미국이나 일본처럼 전문직 종사자들의 근무시간 자율성이 높아져 한국의 첨단 산업의 미래 기술을 책임질 엔지니어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줄 것이란 예상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근로시간 배분과 업무 방식 결정 등에 있어 개인의 자율성이 커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연구개발에 몰두하는 1분 1초의 시간이 누적돼 경쟁사와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R&D에 최적화된 근무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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