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의외의 한 수- 박물관 콘텐츠로서 디지털 휴먼의 한계

머니투데이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 2024.10.29 02:05
중앙박물관 이태희 연구관

일본 최초 체스챔피언, 그는 슈퍼컴퓨터 슈퍼블루와 대결에서 패해 상실감에 빠진 나머지 가족, 사회와 등을 돌리고 폐인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그를 불러내 자신과 체스를 하자고 제안한다. 챔피언은 더는 체스를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으나 이미 게임은 시작됐다. 그런데 이 체스의 말은 실제 사람들이고 킹은 바로 챔피언 자신이었다. 그가 수를 이어가지 않자 노인은 다음 수를 둬 챔피언의 말을 잡았고 그러자 그 챔피언의 말 역할을 맡은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에 챔피언은 수를 이어갔고 결국 킹을 살리기 위해선 퀸을 희생으로 삼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퀸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바로 챔피언의 부인이었다. 이에 챔피언은 퀸 대신 자신을 희생하는 수를 뒀다. 그러자 갑자기 노인을 비롯해 앞서 사망한 여러 사람이 나타나 박수를 치며 챔피언을 환호했다. 그들의 죽음은 연기였다. 그리고 챔피언과 체스를 겨룬 것은 노인이 아니라 슈퍼블루였다. 슈퍼블루는 챔피언의 예상치 못한 수에 자폭하고 말았다. 여러 말을 희생해 왕을 살려야 하는 체스경기에서 왕을 희생하는 수를 슈퍼블루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위 이야기는 2000년에 개봉한 일본의 옴니버스 영화 '기묘한 이야기'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물론 실제였다면 슈퍼컴퓨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런 엔딩으로 마친 데는 컴퓨터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 또는 그 가치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은 오래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그것을 잘 보전하고 소개하기 위해 최신 기술을 사용한다. 그런 까닭에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박물관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한다. AI(인공지능) 기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종종 듣는 제안이 '디지털 휴먼'이다. 즉, 역사 속 인물을 디지털로 복원해 박물관 지식서비스에 활용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AI에 '조선왕조실록'을 입력해 세종대왕을 구현하거나 '난중일기' 등을 학습시켜 이순신 장군을 선보이자고 한다.

디지털 휴먼은 실제 사람의 모습처럼 그려내는 그래픽 기술, 그리고 표정과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출하는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용해 탄생한다. 그리고 여기에 AI를 적용, 말과 생각을 더한다. 그러나 AI로 과거 인물을 복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박물관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까. AI의 판단은 수천, 수만의 데이터와 대량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 결과다. 몇 년 전 아마존은 AI를 채용프로그램에 적용했다가 성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IT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남성이었던 까닭에 AI가 학습한 데이터 역시 그들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위 사례가 보여주듯 데이터만으로는 성차별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디지털 휴먼을 만나야 할지 모른다. 물론 이런 모습을 걸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본질이라 할 수 없다. 결국 디지털 휴먼은 역사적 인물을 재현하는 듯 보일지라도 그것은 데이터로 구성된 허상일 뿐이다.


전시를 설명하다 보면 관람객에게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저거 진짜예요?"다.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는 제일의 이유는 진품(眞品)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대상이 유형이건 무형이건 사람들은 진짜를 보고자 한다. 이런 관람객들에게 디지털 휴먼은 어떤 존재일까. 아마도 순간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재미를 느낄지 몰라도 진심으로 그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즐기는 관람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로 사극을 만들 수는 있어도 사극으로 역사를 만들 수는 없다. 과거의 인물은 AI로 복원하기보다 우리 생각 속, 마음 속에서 펼쳐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더 아름다울 것이다. 거기서는 얼마든지 '의외의 한 수'도 가능하니 말이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베스트 클릭

  1. 1 "월 임대료만 1억"…김희애 18년 전에 산 주차장→빌딩 짓고 '대박'
  2. 2 "개처럼 짖어봐" 아파트 경비원 10명 관뒀다…갑질한 입주민의 최후
  3. 3 "지켜봐라, 우리도 한국처럼 된다"…저출산 경고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
  4. 4 "그새 곰팡이 폈네" 김치 다 버렸는데…하얀 '이것' 정체, 알고보니
  5. 5 "금값 8배 오르면 '은'은 15배 뛰어요"…은 투자가 더 매력적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