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강조하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존슨은 텍사스주 사우스웨스트 주립(현 텍사스주립대학) 사범대학을 졸업해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28년 텍사스주 가난한 농촌 지역인 커툴라에 있는 멕시코계 미국인 초등학교 교장으로서 2년 동안 일했다. 그는 첫 월급의 절반을 학생들 운동장비 구입에 쓸 정도로 헌신적인 교사였다. 교사가 6명뿐인 학교에서 그는 행정적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5~7학년 교육을 담당했다. 이후 휴스턴의 샘 휴스턴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존슨은 교직에 있는 동안 사회적으로 소외된 학생들이 교육 기회를 거의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교육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루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더욱 커졌다.
존슨의 교직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31년 정치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민주당에 들어가 청년조직을 이끌어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다 1937년 텍사스 연방하원의원 민주당 후보로 공천되면서 29세라는 어린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이 됐다. 194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해군 소령으로 참전해 1942년 중령으로 전역했다. 이후에도 하원의원 활동을 이어가다 1949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53년에는 민주당 최연소 상원 원내대표가 됐다. 원내대표로서 그는 리더십과 협상력, 타협술을 발휘하며 정치계 거물로 거듭났다. 1960년 대선을 앞두고는 자연스럽게 민주당 후보로 떠올랐다.
3년 가까이 지난 1963년 11월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존슨의 정치적 기반인 텍사스주 댈러스 유세에 나섰다.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와 함께 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던 케네디는 해병대 출신 리 하비 오즈월드가 쏜 총을 목과 머리에 맞고 과다출혈로 숨졌다. 존슨은 케네디의 시신을 실은 에어포스원 안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하며 취임 선서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가난과 인종 차별을 종식하기 위한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었다. 가장 먼저 손댄 문제는 인종 차별이었다. 멕시코계 학생들이 겪는 차별을 직접 목격한 존슨은 민권 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 존슨 행정부는 1964년 공공장소·고용·노동조합 등 모든 영역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을 제정했다. 1965년에는 흑인의 유권자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투표권법'을 제정했다. 그 결과 1970년에는 남부 흑인의 3분의 2가 투표할 수 있게 됐다.
행정가로서 여러 업적을 남긴 존슨이지만 베트남 전쟁 참가를 결정하며 위기를 초래했다. 참전 초기에는 의회와 여론의 지지를 얻었으나 전쟁이 장기화하고 베트남의 공세에 밀리면서 여론이 나빠졌다. 반전 여론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 파병 병력을 늘렸고 지지율은 더욱 급락했다. 결국 3선(승계로 맡은 첫 임기가 2년 미만인 경우 가능)을 노리던 존슨은 스스로 경선 후보에서 물러났다. 올해 7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접기로 했을 때 존슨의 당시 일이 소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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