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김태리, 미친 재주의 귀한 쓰임

머니투데이 한수진 기자 ize 기자 | 2024.10.21 13:50
'정년이' 김태리 / 사진=tvN


“우리 집 목포서 생선 파는디!”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극본 최효비, 연출 정지인)의 윤정년(김태리)은 매란국극단 안에서 가정 환경이 가장 열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와 함께 국극단 오디션을 본 박초록(승희)은 어머니가 무용가이고, 서복실(정라엘)의 부모는 명동에서 레스토랑을 한다. 정년과 라이벌 관계인 허영서(신예은)는 아버지가 의과 대학 학장에 어머니는 유명 소프라노다. 동료들은 오디션장에서 정년의 배경을 알게 되고는 그를 대놓고 무시한다. 초록은 정년의 면전에다 대고 “시장 바닥에서 생선 팔다 온 거였어?”라며 코웃음 치고, 영서는 “실력 한번 겨뤘다고 시장 바닥에서 노래 팔다 온 너랑 동급이라고 생각하지 마”라며 눈을 흘긴다.


반면 정년이는 매란국극단 안에서 가장 풍부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매란국극단의 최고 스타인 문옥경(정은채)은 우연히 들른 시장에서 정년이의 노래를 듣자마자 자신의 후임으로 점찍었을 정도고, 단원을 뽑는 오디션장에서 몰래 정년이의 노래를 듣던 홍주란(우다비)은 그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실력 평가에 대해 깐깐한 매란국극단의 단장 강소복(라미란)은 연구생들 앞에서 “정년이는 타고난 좋은 성음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정년은 연구생 자선공연인 ‘춘향전’에서 방자 연기까지 완벽하게 해내며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 돌렸다.


'정년이' 김태리 / 사진=tvN


그리고, 정년은 매란국극단 안에서 가장 단단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다. 동료들이 자신의 집안 배경에 대해 이죽거리면 “시장 바닥서 생선 팔다 온 게 뭐?”라며 고개를 더욱 빳빳이 들고, 영서가 “다른 애들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는데 네가 뭐라고?”라고 쏘아붙이면 “이런다고 나가 쉽게 물러날 줄 알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야. 이제부터 두 눈 똑똑히 뜨고 봐라. 내가 뭘 어떻게 해내는지”라고 말한다. 정년의 이 같은 말에는 “실력으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이에 더해 다친 주란을 대신해 다방에서 일하다가 들켜 국극단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도, 단장의 치맛자락을 붙들지언정 절대 주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 단단한 의리까지 지녔다.



정년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며 자랐지만, 그 옆에는 사랑으로 함께해준 어머니와 언니의 풍족한 마음이 있었고, 늘 가슴 설레게 하던 소리의 재능이 자아를 충족해 주었다. 이러한 정년이를 연기한 배우가 김태리라는 점은 인물과 ‘정년이’의 서사를 강화한다. 김태리는 작고 마른 체구와, 가녀린 얼굴선, 그리고 소 같은 눈망울을 가졌다. 하지만 발산하는 에너지는 정반대다. 크게 땅땅한 목청, 안면근육을 다채롭게 쓰는 역동적인 표정, 큰 눈망울 한쪽에 서린 아집. 가느다란 외관의 여성이 예상치 못한 큰 에너지를 낼 때의 반전, 그것의 짜릿함이 김태리가 ‘정년이’를 끌고 가는 힘이다.


'정년이' 김태리 / 사진=tvN


물론 김태리가 작품을 통해 정년이와 같은 역동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은 처음은 아니다. 그는 tvN ‘미스터 션샤인’(2018)을 시작으로 전작인 SBS ‘악귀’(2023)까지 자신만의 자장이 뚜렷한 성격 센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은 나라는 빼앗겼어도 겨레를 잃지 않으려 사대부 영애의 몸으로 주변의 만류에도 총을 들었고,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2022)의 나희도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악과 깡으로 펜싱 칼을 절대 놓지 않고 기어이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김태리는 출세작인 영화 ‘아가씨’에서도 그러했다.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숙희는 사기꾼이자 하녀였지만 누구 앞에서도 쉽게 기죽지 않았고, 자신의 윗전인 히데코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도 않았다.


특히 김태리는 드라마에서 이런 캐릭터를 그릴 때마다 자신의 매력을 잘 보여줬지만, '정년이'에서는 이와 동시에 여배우에게 요구되던 역할 밖의 것들까지 보여준다. 흙감자 같은 투박한 얼굴로 예쁨을 거둬낸 ‘정년이’가 김태리의 작품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유다. 검게 그을린 얼룩덜룩한 피부, 상의는 한복에 하의는 왜바지인 혼란한 복장, 커다란 목청으로 뱉는 사투리는 때때로 거칠다. “주체적인 인물들한테 많이 끌린다”던 김태리는, 예쁘기보다는 단단한 인물을 고집스럽게 좇다 ‘정년이’에 이르렀다. 그는 ‘정년이’ 제작발표회에서 “‘정년이’ 웹툰 원작을 먼저 읽었다. 보통 웹툰을 읽을 때 주인공을 따라가며 읽지만 그게 자기 얼굴로 읽히지 않는데 이상하게 이 작품은 내 얼굴이 입혀졌다”라고 말했다. 김태리는 고집스럽게 좇다 운명처럼 이끌렸던 ‘정년이’에서, 많은 이들의 기대를 거듭 총족하며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굵은 방점을 또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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