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한강의 기적과 제지산업

머니투데이 지영호 기자 | 2024.10.15 05:30

[우리가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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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가 14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문학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작품 열람 서비스 준비를 하고 있다. 2024.10.14. pak7130@newsis.com /사진=박진희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두고 혹자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그동안 60대 이상 서구 남성 위주의 수상 관행을 깨고 아시아 50대 여성이 수상한 것은 124년 노벨상 역사에서 처음이다. 예상 밖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용자가 국한된 한글이라는 언어는 영어권 국가에게 변방에 불과했을 것이다. 작가 자체의 명성도 다른 국가의 경쟁자에 비해 약했다. 한강의 수상을 기적같다고 하는 배경이다.

'한강의 기적'은 본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황폐해진 한국 경제가 단기간 초고속 성장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2차대전 패전 이후 급성장한 서독의 경제성장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른 것에서 차용했다.

경제 부흥은 박정희 정권 시절 추진한 원조경제가 발단이 됐다. 미국 등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가공품을 만들어 파는 방식의 산업이 주목받았다. 가공품이 모두 흰색이어서 이른바 '삼백(三白)산업'이라 불리던 설탕, 밀가루, 방직회사들이 성장의 중심에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기업은 삼성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원조자금을 토대로 국내 생산시설이 없는 설탕, 종이, 페니실린 중 기술장벽이 가장 낮은 설탕을 사업 대상으로 낙점했다. 삼성의 모태가 된 제일제당(현 CJ)은 1953년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이 회장은 1954년 방직회사인 제일모직을 차리고 1958년 밀가루 사업에도 뛰어든다. 삼백산업을 모두 장악한 삼성은 이때부터 급성장했다.

이 회장이 뒤늦게 뛰어든 사업은 설탕과 함께 눈여겨 본 종이산업이었다. 1965년 해외 원조로 세워진 새한제지를 그해 인수했는데 3년 뒤 전주제지로 이름을 바꿨다. 이 회장의 첫째딸인 이인희 고문이 이끄는 한솔그룹의 모태가 되는 회사다.


당시 제지업은 유망산업이었다. 삼백산업에 종이를 더해 '사백산업'으로 불러도 무방할만한 했다. 매출의 대다수는 인쇄용지였다. 전주제지는 신문용지가 주력이었다. 삼성은 같은해 중앙일보도 창간했다. 제지산업의 수직계열화를 고려할만큼 관심이 컸다. 신문용지보다 먼저 생긴 백상지는 소위 책에 사용하는 종이로, 신문용지 다음으로 잘 팔렸다. 1956년 사업을 시작한 무림제지가 대표적인 백상지 분야 제지회사다.

인쇄용지를 주축으로 제지산업을 이끌어온 두 회사는 현재 이 시장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스마트 기기가 넘쳐나는 시대변화로 인쇄물에 관심을 두는 신규수요가 급감해서도 있지만 국내에서의 활자기피현상이 두드러져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2017년 발표 한국의 성인 1인당 독서량은 0.8권으로 세계 166위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그의 작품을 찾는 소비자가 급증했다고 한다. 그동안 침체됐던 출판인쇄업계가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소식이 연이어 나온다. 하지만 후방산업인 제지업계의 반응은 차갑기만하다. A사의 경우 한강 효과를 1일당 종이출고 30톤 증가로 보고 있는데 이 회사의 전체 출고량 1000톤에 비하면 미미하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한강 신드롬에 대해 '바다에 조약돌 던지는 수준'이라고 했다. '한강의 기적'에 기여한 제지산업에 다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사진=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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