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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째 손녀딸의 절규 "사망신고도 못해"…할머니 어디있어요?━
수연씨에게 할머니는 엄마였고, 아빠였다.
매일 아침 냉장고에 있는 콩 우유도, 퇴근 후 식탁 위에 차려진 고봉밥도 할머니가 준 사랑이었다. 할머니는 개봉동에서 가장 목청 큰 싸움꾼이기도 했다. 첫 손녀인 수연씨에게 항상 '내 편'이 돼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수연씨는 이렇게 개봉동 한 주택에서 할머니와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내 편이었던 할머니가 어느 순간 '깜빡깜빡'했다. 하루는 김치가 냉장고 안에서 썩어 하얗게 곰팡이가 피었다. 수연씨가 출근할 때 버린 김치를 할머니가 다시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할머니 이거 썩었어. 이거 진짜 버려야 하는거야. 이거 못 먹어."
"아니야, 아니야!"
매일 밤이 지옥이었다.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 30분마다 이 일을 반복했다. 사랑하는 할머니는 어느새 애증의 존재가 됐다. 19년 전인 2005년, 24세의 수연씨는 할머니 변화를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다.
◇"시계방 좀 다녀올게"…엄마였고 아빠였던 할머니가 사라졌다
"아가, 할머니 잠깐 동네 앞에 시계방 다녀올게."
"지금 이 시간에?"
"시계방 수리 맡겼는데 깜빡하고 못 갔다왔어."
"어? 알겠어. 그럼 빨리 다녀와."
30분 뒤, 창문 밖에서 두두두두 빗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에 나가서 주변을 살폈는데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수연씨는 불안한 마음에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 시장, 시계방을 돌아다녔다. 3시간이 넘어도 할머니는 보이지가 않았다. 밤 12시 수연씨는 지구대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할머니가 없어졌어요."
"성함이랑 나이는요?"
"75세 김순기 할머니요. 치매가 있어요."
"성인은 실종 신고는 안 되고 처음에 가출 신고로 접수가 돼요. 좀 더 기다려보고 안 되면 그 때 실종 신고로 할게요."
"뭐라도 좋아요. 제발 찾아주세요."
지구대 밖을 나오는데 머릿 속이 하얘졌다. 개봉동은 광명, 부천, 서울 시내까지 이동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수연씨는 뛰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가슴이 턱… 180도 달라진 삶
수연씨는 개봉동 일대를 미친듯이 돌아다녔다. 온종일 할머니만 찾아다녔다. 사람 얼굴만 봤다. 뒤를 돌아본 사이에 놓쳤을까 다시 몸을 돌려 사람 얼굴을 살폈다.
다음날에는 구로구 근처에 있는 응급실, 요양원 수십 곳을 찾아갔다. 병원 사람들을 붙잡고 할머니 사진을 꺼내 물었다. "저희 할머니인데요. 혹시 여기 '김순기' 할머니 없나요?"
"글쎄요. 처음 보는데요."
"그런 분 없는데요."
"몰라요. 나가주세요."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서울 구로경찰서에 찾아가서 머리카락 DNA를 등록했다. 실종 신고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치매 노인은 2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실종 아동이었다. 2005년에는 치매가 우리 사회에 생소한 병이었다.
잠드는 게 괴로웠다.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밥을 먹었을까'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달 만에 10㎏가 빠졌다. 배 근육이 과도하게 수축돼서 병원에서 근육을 푸는 주사를 맞았다.
◇사기인 것을 알지만…거부할 수 없는 '제보전화' 그렇게 2000만원을 잃었다
"이렇게 생긴 할머니 보셨나요? 이마에 사마귀도 있고 안경도 두껍거든요."
"모르겠는데요."
하루는 조계사 근처에서 할머니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할머니가 한 여성의 손을 잡고 무료 급식소 안에 들어갔다고 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발… 제발…'
1년 동안 매일 오전 11시 조계사 앞에 찾아갔다. 탑골공원 앞에 길게 줄 선 어르신들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수연씨는 소중했던 디자인 일도 포기했다. 낮에도 할머니를 찾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지나는 이들에게 실종 전단지를 건네면 손을 저었다. 좌절할 여유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제보 전화가 왔다. 사례금도 요구했다. 본인이 탐정인데 300만원을 주면 찾아주겠다는 연락도 받았다.
사기인 것을 알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연씨는 6개월 동안 2000만원을 잃었다.
◇19년이 흘렀지만… "사망 신고, 못하겠어요"
시간은 흘렀지만 수연씨는 할머니 손을 놓지 못했다. 19년째 할머니 사진을 코팅해서 지갑에 넣고 다닌다. '왜 너만 과거에 매여있니' '사망신고를 하는 건 어떠니' 여러 말을 듣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안 해요. 그냥 무연고 시신이라도 할머니를 발견할까봐. 사망 신고하면 그것도 못하니까 포기를 못하는 거에요."
"진짜 힘들어요. 하나가 떠오르면 연달아 생각나거든요. 저는 19년째 콩 우유를 못 먹어요. 보면 생각나고 눈물 나니까. '배회중이니 연락주세요' 알림 문자도 보면 빨리 지워요."
추석이 다가오면 더 먹먹하다. 명절에 대한 기대도 없다.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 마음만 아프니까 가족들도 굳이 꺼내지 않는다. 작년에는 용기를 내서 개봉동에 있던 집을 방문했다. 시간은 흘러 집은 사라지고 빌라가 들어섰다.
19년이 지나도 상처는 여전하다. "저 오늘 담담하게 말했지만 당분간 아플 거에요. 이게 참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결국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있었잖아요.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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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10살때 실종된 딸 희영이…"어디선가…" 아빠는 울었다━
'공부 좀 못하면 어때. 운동 뒷바라지를 해줘야겠다.'
아는 문제도 틀려 온 딸 손바닥을 자로 몇 대 때린 일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30년 전 서기원씨(61)는 사업가로서 성공해 딸을 뒷바라지해주는 것만이 딸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1994년 4월27일 수요일 오후 5시쯤. 여느 때처럼 공사 중이던 서씨는 희영이 이모에게 전화를 받았다.
"형부, 희영이가 저희 집에 안 왔어요. 희영이 집에 있나요?"
◇"형부, 희영이가 안 왔어요"…젊은 아빠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구멍가게에 갔다. 주인은 희영이가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고 했다. 다시 시청 앞 도로를 건너 중앙초등학교에 갔다. 희영이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자전거를 탔다. 학교에도 아이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놀다 헤어졌다"고 할 뿐이었다.
오후 7시.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차 핸들을 잡은 손이 계속 미끄러졌다. 남원역(지금은 폐역이 됐다) 앞 역전파출소로 갔다. 서씨의 마음은 급한데 사람들은 속 편한 소리를 했다. "뭐 어디 갔겠어요, 놀고 있겠죠. 사장님 조금만 기다리시죠." 30년전 파출소 직원 말이 아직도 서씨를 괴롭힌다.
서씨의 호소에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실종 신고 후 72시간이 지나기 전에 경찰이 초동수사를 벌일 수 없었다.
파출소를 나온 서씨는 병원 응급실과 개인 병원들을 찾았다. 한 줄 한 줄 뜯어봐도 '서희영' 이름 석 자가 없었다. 여자아이는 아예 안 들어왔다는 말만 돌아왔다.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응급실이 아닌 남원의료원 영안실로 갔다. "여자아이 시체 들어온 게 있습니까." 아버지는 몸을 떨며 묻고 또 물었다.
밤이 돼도 희영이는 집에 오지 않았다. 친구들과 차 몇 대를 나눠 타고 희영이를 찾았다. 광한루, 절, 하천가. 아이는 없었다. 동이 튼 아침에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동네 광고상에 전단과 현수막 제작을 맡겼다. 수천장을 인쇄해 전북 남원 인근 도시인 장수, 곡성, 순천에 붙였다. 방송국에도 보도를 부탁했고 저녁 뉴스에 희영이 실종 소식을 전했다. "부산에서 본 것 같아요" 제보가 오면 부산으로, "곡성에서 봤어요" 하면 곡성으로 갔다.
실종 72시간이 지난 뒤 경찰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탐문 수사를 벌였다. 이게 그때 그 시절 매뉴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씨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 갔다. "실종 수사 제일 잘하는 사람 연결해주십시오." 서씨 말에 돌아온 답은 "초동수사에서 놓쳤는데 여기서 어떻게 찾습니까" 였다.
동네에 의심되는 남자 집 앞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 불법 행위인 줄 알면서도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윤락가를 뒤졌다. 국문학을 전공한 희영의 이모가 절절한 편지 3000장을 손으로 써 보육시설, 장애인시설에 보냈다.
"우리 시설에 그런 아이는 없습니다."
단 2곳에서만 답장을 받았다.
◇실종 후 30년, 누구보다 열심히 산 아버지…'희영이도 어디선가'
'희영이도 어디선가 혼자 지내지 않을까.'
서씨는 1994년부터 10년간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나섰다. 그 아이들은 겨울에도 불을 못 때 이불을 높게 쌓아 잠을 잤다. 폐차 안에 자며 밖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서씨는 자기 집 1층을 내주고 비디오를 틀어줬다. 자기 돈으로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그때는 한 명 한 명이 희영이 같았다고 한다.
희영이를 찾는 일은 서씨의 삶이 됐고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실종 가족이 겪는 어려움이 서씨에게도 찾아왔다. 서씨 부부는 아픈 이별을 경험했다. 서씨가 벌어둔 재산도 점점 줄었다. 집도, 사업장 8개도 모두 팔았다. 1990년대 동네 몇 대 없던 외제차들도 팔았다. 이제는 중고차를 몬다.
그는 아이가 사라진 뒤 이듬해 '전국 실종자 가족들의 모임' NGO 단체를 결성했다. 2008년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를 맡은 뒤 매년 자기돈 2억원을 운영에 썼다.
이번 추석에 그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낼 것이라고 했다. 집에선 그도 막내다. 한 때 명절에 형의 집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 발길을 끊었다. "저는 가족들에게 불편한 존재예요. 희영이 생각을 가족들이 할 수밖에 없어서… 웃을 일이 있어도 제가 있으면 잘 웃기 어려운 거예요." 서씨는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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