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 보다 비행 자격증 먼저…아폴로11호 3인방중 가장 먼저 영면[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민수정 기자 | 2024.08.25 06:00

편집자주 |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 별세/사진=머니투데이 DB

2012년 8월25일(현지시간) 우주비행사 닐 올던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이 향년 82세 나이로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운명했다. 같은 달 초순 심혈관계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후 합병증으로 숨졌다.

함께 달로 향했던 아폴로 11호 3인방 중에 가장 먼저 영면에 들었다. 당시 사령선 조종사였던 마이클 콜린스는 "암스트롱은 최고였다. 그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콜린스는 암스트롱 사망 후 9년 뒤인 2021년 세상을 떠났다.

미국 최초로 지구궤도를 비행했던 우주비행사 존 글렌 전 상원의원은 암스트롱을 "달 착륙 이전이나 이후에도 내내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글렌 의원도 그로부터 4년 뒤 향년 95세 나이로 별세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당시 성명에서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성취의 순간을 전했다"며 "오늘날 그의 정신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은 2012년 9월13일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치러졌다. 고인의 뜻에 따라 유골은 화장하여 대서양 바다에 뿌려졌다. 닐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기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또한 유족에게 위로 서신과 함께 태극기와 감사 액자 등을 보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던 인물답게 그의 영결식 노래는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이었다고 한다.


운전면허 따기 전 '비행 자격증 취득'…암스트롱의 남다른 유년


닐 암스트롱의 유년시절./사진=The Life of Neil Armstrong 홈페이지

닐 암스트롱은 1930년 8월5일 오하오주 와파코네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남달리 비행에 관심이 많았다.

6살 무렵 아버지 손에 이끌려 민간수송기 '포드 트라이모터'를 타면서 비행기에 눈을 뜨게 됐다. 16살 때는 운전면허를 따기도 전에 비행 자격증부터 취득했다. 17살에는 퍼듀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에 입학했다.

한국과 인연도 깊었다. 암스트롱은 휴학 후, 미 해군 조종사로서 1951년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78번의 전투를 수행했으며 북한 지역에서 산악 비행을 하던 도중 우측 날개가 파손돼 적진에 고립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 서울 수복에 큰 공을 세워 3개의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암스트롱은 1955년 대학 졸업 후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항공기 성능을 테스트하는 시험 비행사가 됐다.

1962년에는 제2기 우주비행사로 발탁돼 약 4년 뒤 제미니 8호 사령관으로서 첫 우주비행을 경험했다. 제미니 계획은 인간이 달에 착륙했다 귀환하는 '아폴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우주 비행 기술을 개발·습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전 세계인이 숨죽여 봤다"…그날의 기억


왼쪽부터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올드린./사진=NASA 홈페이지

1969년 7월16일 닐 암스트롱은 사령관 자격으로 마이클 콜린스(사령관 조종사) 그리고 버즈 올드린(달 착륙선 조종사)과 함께 아폴로 11호에 몸을 실었다.

나흘 뒤인 7월20일 오후 8시17분쯤 착륙선은 마침내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무사히 착륙했다. 다음 날 새벽 암스트롱은 착륙선에서 사다리를 타고 달 표면에 내려갔다.

닐은 첫발을 내딛기 전,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전 세계 5억2800만여명에게 '처음 본 달 표면의 입자가 가루처럼 곱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날로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지구 이외 천체에 도달한 인물이자, 국가적 영웅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서 찍은 버즈 올드린의 모습./사진=인스타그램(@neilarmstrongofficial)

비행사들은 약 2시간30분 동안 달 표면에 머물며 여러 활동을 했다. 카메라와 과학 장비를 설치하고 암석 표본을 채취했다. 또 성조기를 달에 세우는 등 선외 활동을 통해 당시 경쟁 관계에 있던 소련보다 미국이 항공우주 분야에서 앞서나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들은 달에 50센트 동전 크기의 회색 실리콘 디스크를 두고 오기도 했다. 여기에는 전 세계 73개국 지도자 및 전·현직 미국 대통령 등이 남긴 메시지와 미 의회 지도부, 나사 관련 상·하원 4개 위원회 위원 등 명단이 미세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문구를 남겼다.

아폴로 11호는 같은 해 7월2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멀리 떨어진 해역으로 무사 귀환했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비해 바로 사람들과 접촉할 수는 없었고 2주 정도 격리 기간을 가졌다.

지구로 귀환 후 아폴로 11호 3인방은 여러 국가에서 환대받았다. 닐 암스트롱은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우주 명예 훈장 △일본 문화 훈장 등을 수상했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세계 24개국을 순방했다.

특히 1969년 11월 3일(한국시간)에는 한국에 들러 박 전 대통령을 만나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암스트롱 등 우주비행사들은 박 전 대통령에게도 달에 놓고 온 것과 같은 작은 마이크로필름과 확대경을 선물했다.

대통령기록관에 따르면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암스트롱에게 "달에 첫발을 디딜 때 주춤주춤한 것은 왜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암스트롱은 "달 표면이 먼지층이기 때문에 푹 빠져들어 갈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있어 달 표면 경도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믿었던 단골 미용사의 '배신'…파란만장한 말년


2011년 당시 닐 암스트롱의 모습./사진=인스타그램(@neilarmstrongofficial)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암스트롱은 달 착륙 이후 개인적으로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는 달에서 돌아온 뒤에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공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1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 자문위원으로서 다시 방한했다.

그러나 점차 은둔생활을 하게 됐고 성격 또한 염세적으로 변했다. 지나친 인기로 인해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과도한 관심이 쏟아졌고, 스토커도 많았다. '달 착륙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음모론에 시달린 것도 문제였다.

결국 그는 1979년 교수직을 내려놨고 1994년에는 아내와 파경을 맞았다. 심지어 2005년엔 암스트롱이 자주 가던 이발소의 미용사가 그의 머리카락을 훔쳐 3000달러(약 400만원)에 팔아넘기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암스트롱의 아내는 인터뷰에서 "(암스트롱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에 대한 찬사를 자신이 다 받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우주개발 분야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세상을 떠나기 약 1년 전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폐지되자 암스트롱은 의회에 출석해 미국의 유인 우주비행 사업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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