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 건 죽은 것인가

머니투데이 뉴욕=박준식 특파원 | 2024.08.08 00:35

(15) 맨해튼 클래스 - 김홍빈 권용은 미술작가 뉴욕 트라이베카 2인 데뷔전

편집자주 | 세계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부르는 뉴욕(NYC)과 맨해튼(Manhattan)에 대해 씁니다. 국방비만 일천조를 쓰는 미국과 그 중심의 경제, 문화, 예술, 의식주를 틈나는 대로 써봅니다. '천조국'에서 족적을 남긴 한국인의 분투기도 전합니다.

여기 터져서 구멍난 자국이 있다. 그저 흔적이라고 하기엔 상처가 너무 크고, 흉터라고 하기엔 봉합되지 않은 완연한 종적이다. 항상 관심은 새로 태어난 것에 쏠리지만 누군가는 새 걸 분출해낸 터전에도 천착한다. 화려한 유색채 캔버스를 뚫고 나간 것은 무엇일까. 생명을 쏟아내고 남아 상흔을 치유해야 하는 터전은 어떤 정화 과정을 거치는가. 다시 재생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까.

자라온 나라를 떠나 유학이라는 핑계로 무작정 정착한 뉴욕에서 작가 김홍빈은 혼돈과 불안감을 내내 떨치지 못했다. 분명히 터져 나왔는데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수시로 커졌다. 하지만 맨해튼에서 떠돌며 받은 자극과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과장된 색감으로 표현했다. 노스텔지어의 형상화다. 그걸 '네임리스 코쿤(Nameless Cocoon)'이라고 이름 붙였다.

김 작가는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하는 과정을 비유로 오래된 정체성을 해체하고, 뉴욕의 낯선 환경 속에서 새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밝은 색채와 과장된 형태는 실제로 뉴욕을 닮았다. 역동성과 혼돈을 표현하면서도 예술을 통해 존재와 자아를 탐구한다.

맥락을 들어보니 터진 것은 유기체일 수도, 그저 탈피돼 생명력을 잃어버린 껍데기일 수도 있다. 다만 균열 직전까진 적어도 새로운 어떤 소중한 걸 감싸던 보호막이다. 터뜨리기 전까지 겹겹이 싸맸던, 그 플랫폼엔 삶과 죽음의 서사시가 있다.

홍빈이 생사의 경계를 사색했을 때, 그의 동료는 삶의 본질을 누리려는 개체의 근원을 탐구했다.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식물이 아닌 움직이는 생명체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건 대부분 붉은색이다. 벌건 몸뚱이를 페르소나 삼은 권용은 작가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아바타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들에겐 유쾌하게도 생선 대가리 얼굴을 선물했다. 눈동자를 고정하고 표정을 지워내 본능에 충실한 개체를 구현한 것이다.

이른바 '피쉬 대가리'라고 형상화된 이들은 두 손가락으로 잔을 들어 목구멍을 축인다. 짐짓 기품 있게 술잔을 쥔 모습이다. 그러다가 너무 만취했을까, 아예 잔속에 빠진 고주망태도 있다. 페스티발에서 열심히 먹고 마시며 흔들어대던 그들은 한가롭게 낮잠을 자거나 놀랍게도 책을 읽는다. 문득 귀여운 캐릭터처럼 보였던 생선 대가리가 무척 고매한 영혼인줄 알았던 내가 아닐까 하는 대입을 해본다. 껍질 밖으로 퍼져 나온 붉은 색 본질은 그런 부끄러움인가 보다. 생선 대가리보다는 좀 더 고상하게 살고 있다고 여겼던 게 실은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다.

용은이 그린 대상은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스스로 찾아 헤매는 작은 자유와 여유다. 그는 "복잡한 생각이 없어도 좋을 듯한 물고기 가면을 쓰고, 핑크빛 날것의 살덩이를 드러냈다"며 "작은 술 한잔과 함께 짧은 오수를 즐길 줄 아는 대리자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평생의 일상을 이질적이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페르소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온하고 행복하고 여유롭다.

김홍빈 권용은 작가는 '슬라이스 오브 워터멜론(Slice of Watermelon)'이라는 이름으로 뉴욕 트라이베카의 스테파니김 갤러리에서 오는 9월 7일까지 2인전을 연다. 한국에서 홍익대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배우자들과 함께 맨해튼으로 건너와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에서 석사를 마친 신진작가들의 뉴욕 데뷔전이다.

안경을 쓴 권용은 작가는 그를 벗고 일상을 바라봤을 때의 흐릿해진 초점으로 '블러리 월드(Blurry World)'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초점을 맞춘 현실은 가끔 잔인하지만, 뿌옇게 변한 세상은 경계가 흐릿한 포용의 매력을 안긴다. 세상을 꼭 명료하게 봐야만 속 시원한 것은 아니다. 자질구레한 걱정들과 복잡한 사념을 날렸을 때, 그 잠깐의 환기가 에너지를 준다.

김홍빈 작가는 가난한 예술가로서 뉴욕에서의 삶을 '가치의 초월(Transcendence of Value)'이라는 도전적인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꿈꿨던 삶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달러'라는 지폐로 치환됐다. 미국은 예술가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지만 동시에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곳이다. 뉴욕에 아직 녹아들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 이방인 작가는 예술적 표현과 물질적 가치 사이의 긴장을 관음적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 안에는 늘 경제적 교환수단이 자리한다는 자각을 집어넣었다.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20여년간 활동하다 최근 뉴욕 트라이베카에 정착한 김승민 큐레이터가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올해 초 가수 권지안(솔비)과 이민우(신화) 등 이른바 아트테이너들의 맨해튼 소호(Soho) 데뷔를 주도해 성공시켰던 김 큐레이터는 이번 2인전을 상큼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김 큐레이터는 "젊고 역동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한국 출신의 신진 작가들을 뉴욕에 소개하고 싶었다"며 "에너지가 넘치고 새로운 화법으로 창의적 시선을 뿜어내는 작품들에 대한 뉴욕 컬렉터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좋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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