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패권 잡으려면…'부자 과학자' 희망 키워줘야"

머니투데이 대담=김유경 정보미디어과학부장, 정리=박건희 기자 | 2024.07.29 05:40

[머투 초대석]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원장
'젊은 연구자' 유인하려면…기술이전 등 수익창출, 인적 네트워크 지원해야
내년 50주년 '1호 출연연'…"50큐비트급 양자컴 개발, 도전·혁신적 연구 선도"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제16대 원장 /사진=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향한 국민과 국가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날로 심화하는 기술 패권 경쟁에서 선두에 설 수 있는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는 겁니다. 연구자 개개인의 능력에 매달리기보다는, 목표와 전략을 공유하는 집단지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출연연 내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11일 대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표준연) 본원에서 만난 이호성 원장은 "표준연을 비롯한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과학기술계가 맞닥뜨린 현실이 낙관적이지 않다"며 입을 열었다. 미국,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가 반도체, AI(인공지능), 양자컴퓨터 등 분야에서 가장 먼저 최신 기술을 확보하고자 막대한 연구 자금을 쏟아붓고 있어서다. 이 원장은 "말 그대로 '초를 다투는' 기술 패권 경쟁의 시기"라고 말했다.

한국 과학기술 수준의 현황과 미래가 계속 심판대에 오르면서, 국가 주도로 운영하는 공공연구기관이자 국내 과학기술 R&D(연구·개발)의 중심인 출연연의 존재 의의에도 물음표가 붙었다. 민간기업의 자본력과 시장성, 대학의 자율성 사이에서 출연연의 '특장점'을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젊은 연구자의 잇따른 출연연 이탈로 현실화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3년 상반기까지 출연연에서 대학·기업·타기관으로 이직한 연구원은 720명에 달하며 매년 증가세다.

1986년부터 약 38년간 표준연에 몸담은 과학자 이 원장은 "어떤 시기보다 더 집단지성을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원 내부에서부터 변화를 일으키고자 전면적 조직 개편에 나섰다. 이 원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초'를 정의하는 시간 전문가…"한국은 국제 측정표준계의 선두 주자"


표준연은 2008년 처음으로 국내 첫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했다. 사진은 표준연 본원에 설치돼 있는 대한민국 표준시를 나타내는 시계. /사진=한국표준과학연구원

-표준연의 원장으로 취임한 지 약 반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소회는.
▶경제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기입니다. 표준연을 포함한 출연연과 과학기술계가 맞닥뜨린 현실이 낙관적이지 않지만, 출연연에 더없이 중요한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시기입니다. 대덕연구개발특구단지 '1호' 입주 기관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국가전략기술 분야 중심으로 도전적·혁신적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표준 과학'은 생소할 수 있는 연구 분야인데, 어떤 것을 연구하나요.
▶표준은 '세상의 기준'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 이론이 만들어져도 이것이 실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으면 그 이론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실험을 위해선 반드시 무엇인가를 재는 측정의 과정이 있어야 하고, 표준은 측정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무게의 단위 킬로그램(㎏), 길이의 단위 킬로미터(㎞) 등이 모두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측정 단위입니다.

표준연은 국제무대에서 측정 표준을 정하는 데 기준을 제시하고, 한국 내에서 통용되는 표준이 국제적 표준과 동등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연구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생산한 모든 제품은 문제없이 엄격한 수출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되지요. 또 가장 정확한 측정 기술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국가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측정 표준 분야에서 전 세계 5위권을 차지한 상위권 국가입니다.

-세계협정시(UTC) 확립에도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요.

▶세계협정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시를 말합니다. 지구의 '1초'를 정의하는 기준이지요. 세계협정시는 온도 등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일정한 주파수를 유지하는 원자시계에 의해 정해집니다. 일반적으로 세슘(Cs)이 방출하는 진동수를 기준으로 1초를 잽니다. 표준연이 2008년 독자 개발한 세슘원자시계 KRISS-1은 1초에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하고, 이 진동수만큼 흐른 시간이 우리의 1초입니다. 대한민국의 표준시도 이처럼 표준연이 독자 개발해 온 원자시계들로 정의합니다.

처음 연구할 때만 해도 국내 원자시계 전문가는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맨땅에 헤딩'과도 같았던 1세대의 연구를 바탕으로 훨씬 더 뛰어난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엔 3세대 격인 이터튬 광시계(KRISS-Yb1)가 개발됐습니다. 20억년 동안 1초 정도의 오차가 날 만큼 정확한 시계지요. 2030년경엔 이터븀 광시계를 이용해 세계의 '초'를 재정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24년 기준, 이터븀 광시계로 측정한 데이터를 세계도량형국으로 꾸준히 전송 중인 국가는 한국뿐입니다. 한국이 선두 주자인 셈이지요.



젊은 연구자 유인하려면…'부자 과학자' 가능성 제시하고 국제 경험 통해 자부심 길러야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제16대 원장 /사진=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런 연구 성과를 위해선 인재 확보가 필수지만, 젊은 연구자의 출연연 이탈률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연구자에게는 출연연뿐만 아니라 대학, 기업체라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들을 출연연으로 오게 하려면 유인책이 필요합니다. 과학자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기술 이전료나 기술 사업화 등으로 연구자가 연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연구자가 자신의 분야에 자부심을 갖게 될 계기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표준연은 국제 협력의 일환으로 신인 연구자를 국제기구나 해외 연구기관에 파견 보내,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를 쌓을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연구 주제가 전 세계 과학 커뮤니티에서 얼마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이해한다면 연구자의 자부심을 느끼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막대한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일 겁니다.

-조직 개편과 동시에 인사 평가 방식도 바뀌었다고.
▶출연연이 수행해야 할 연구에선 집단지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대학의 교수 1명이 주도하는 연구와 출연연의 연구 그룹이 주도하는 연구는 분명히 달라야 하지요. 출연연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오랜 시간 연구하는 만큼, 그 과정에서 지식과 기술이 고스란히 축적됩니다.
이를 위해 출연연은 기존 소속과 상관없이 비슷한 연구 분야끼리 협력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연구원에 소속돼 있는 연구자가 서로의 분야를 이해하고 대화하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물리적인 결합을 시도한 겁니다. 조직 개편에 따라 인사 평가 제도도 절대평가 방식으로 개선했습니다. 매우 도전적인 연구 주제여서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더라도, 충실히 연구하고 있다면 적어도 기본 등급은 받게 됩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제도를 악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규제를 자꾸 만들면 노력하는 연구자가 도전적이고 수월성 있는 연구를 해나가는 데 방해가 됩니다. 연구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장애물을 거둔 것입니다.

-내년이면 표준연 설립 50주년입니다. 남은 목표는.
▶지난해 '3대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양자 기술의 국가적 허브가 될 양자국가기술전략센터를 출범했습니다. 올해 상온 양자컴퓨터의 가능성을 열어줄 '2차원 상온 스커미온(skyrmion) 생성·제어 기술을 개발했고 올해 말까지 20큐비트급 초전도 양자컴퓨터 시스템을, 2026년엔 50큐비트급 양자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출연연은 최근 공공기관 해제에 따른 인건비 유연화, R&D 예타제도 폐지 등 다양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춰 표준연은 대학이나 기업에서 하기 어려운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연구를 선도하고, 우수한 젊은 인력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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