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사퇴, 민주당에 약일까 독일까…미국 역사 살펴보니

머니투데이 김하늬 기자 | 2024.07.22 13:25

[바이든 사퇴]

[워싱턴=AP/뉴시스] 21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밖에서 가족과 함께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하기 위해 나온 10세 소년이 바이든에 대한 그간의 고마움을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으로 델라웨어주 사저에서 격리 중이던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을 107일 남기고 후보직을 전격 사퇴했다. 2024.07.22.
재선에 도전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선을 107일 앞두고 후보에서 사퇴했다. 앞서 치러진 예비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공식 인준 절차만 남아있던 바이든 대통령의 선택에 미국 정치판이 '시계 제로'에 빠졌다.

미국 역사상 재선 도전을 포기한 현직 대통령은 많지 않다. 대통령 중임제를 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초선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서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례적으로 당내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바이든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본선 경쟁력'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 밀린다는 판단에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대선 역사를 살펴보면, 현직 대통령이 재선·3선을 노리며 경선을 뛰다 중도 사퇴하면 그 정당은 대선에서 패배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역 민주당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포기했을 당시 전쟁 영향으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던 점, 중간선거에 부진한 결과를 낸 점 등이 발견된다.


공화당의 21대 대통령 체서트 A.아서, 1884년 시카고 전당대회 결과 확인 후 빠른 포기


미국의 21대 대통령 체서트 A. 아서(공화당)/사진=미 백악관 홈페이지
미국의 21대 대통령이었던 공화당 소속 체서트 A. 아서는 1884년 현직 대통령으로 재선에 도전했다가 중도 사퇴한 첫 번째 인물로 알려졌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1881년 공화당의 20대 부통령으로 먼저 뽑혔다. 그해 9월,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가 총격당해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아서는 21대 대통령직에 올랐다.

아서는 3년여간의 대통령직을 수행한 뒤 1884년 재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해 7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국립 회의에서 예비선거 결과 본인이 3위를 한 것을 확인한 뒤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당시 유력 대선후보였던 제임스 G. 블레인이 주요 대의원 투표에서 자신보다 두 배 이상의 표를 확보한 것을 알게 된 아서는 대선 후보직을 넘긴다고 공식 선언했다.

뒤늦게 알려졌지만 아서는 대통령 재임 때 신장질환인 브라이트 병에 걸렸다. 이 병의 증상은 무기력함, 정신적 우울, 메스꺼움 등이다. 아서는 퇴임 후 뉴욕에서 다시 변호사 일을 시작했지만, 병이 악화하면서 퇴임 1년 8개월 만인 1886년 뇌일혈로 생을 마감했다.

공화당은 당시 대선에서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줬다. 22대 대통령은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됐다.



민주당의 33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제2차 세계대전 여파로 경선 도중 사퇴


미국의 33대 해리 S. 트루먼(민주당) /사진=미 백악관 홈페이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가장 심했던 1952년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다.

해리 S.트루먼은 1945년 미국의 제34대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선된 지 82일 만에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후 1948년 재선에 성공했고, 1953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미국의 33대 대통령직을 역임하는 동안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며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은 인물로 평가된다.

1952년 초까지만 해도 트루먼이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다는 건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강력한 경쟁자가 없었고, 제도적으로 3선이 가능했다. 트루먼 대통령 재임 도중 대통령 3선을 금지한 수정헌법 제22조가 통과됐지만, 이 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아 트루먼은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다. 당내 여론조사에서도 트루먼이 32%의 지지율을 기록, 21%의 키포버 의원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무당층으로 대상을 한정하면 트루먼 18%, 키포버 36%로 오히려 키포버가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의 결정적인 패배 원인으로 1951년 한국전쟁의 영웅으로도 알려진 더글러스 맥아더를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한 사건이 언급된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 이유로 내쳤는데, 전쟁 직후 국민적 영웅이었던 그를 해임한 게 지지율에 악재로 작용했다. 해임된 맥아더가 귀국 후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뒤 지지율은 더 추락했다. 맥아더 해임 직후 갤럽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율이 22%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갤럽 역사상 가장 낮은 수치의 현직 대통령 지지율로 전해진다.

결국 낮은 지지율로 1952년 경선을 강행하던 트루먼은 그해 3월, 뉴햄프셔 예비선거 결과를 확인한 뒤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트루먼을 제치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당선된 사람은 애들레이 E.스티븐슨이었다.

그해 대선도 정권교체로 마무리됐다. 1952년 11월 공화당 대선후보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34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20년간 유지되던 민주당 장기 집권을 종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당 36대 대통령 린드 B.존슨, 베트남 전쟁 겪으며 지지율 급락으로 경선 중도포기


미국의 36대 대통령 린드 B. 존슨(민주당)/사진=미 백악관 홈페이지
미국의 36대 대통령 린드 B. 존슨(민주당)도 1968년 3선에 도전했다가 중도 하차했다. 당시 민주당과 존슨의 상황은 1952년 트루먼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민주당 대통령 모두 △대선 바로 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야당 승리 △전쟁상태(1952년 한국전쟁/1968년 베트남전쟁) △3월 뉴햄프셔 예비선거 패배 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존슨도 1961년 미국의 제37대 부통령으로 당선돼 백악관에 입성했다. 2년 뒤인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존슨은 에어포스원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제3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첫해, 인권법 명문화와 확장 재정정책으로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얻으며 1964년 재선에 성공했다.

당초 존슨의 3선이 유력했다. 미국 법에 이전 대통령의 유고나 사임으로 2년 이내의 임기를 계승한 대통령은 3선까지 이론적으로 가능했기 때문. 1966년 2월까지만 해도 존슨의 대통령 재도전을 지지하는 여론이 52%였다.

하지만 재선 이후 길어진 베트남 전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민주당 내 반전 세력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젊은 층과 유색인종의 반전 운동이 지지율을 떨어뜨렸는다고 평가된다. 1968년 1월 7일 여론조사에서 존슨은 74.3%의 지지를 기록했고 매카시는 16.7%에 그쳤다. 하지만 그해 1월 30일 일어난 베트콩의 '구정 공세'로 승리를 낙관하던 미국 내 여론이 큰 충격을 받으면서, 존슨 대통령의 운명을 바꿨다는 평가다. 뒤이어 일어난 '68혁명'으로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진보 진영의 베트남 전쟁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존슨 지지율은 추락했다.

존슨은 결국 그해 3월 뉴햄프셔 경선 결과를 보고 선거를 포기했다. 투표는 존슨(49.62%)이 매카시(41.94%)를 이겼지만,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후보인 유진 매카시가 2개월여 만에 이렇게 치고 올라올 정도로 돌풍이 엄청나다는 걸 확인한 후 스스로 출마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직 대통령 존슨의 선거 포기는 또다시 정권을 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해 11월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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