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서 지독하게 싫으면서도 중독적인 요소는 불확실성이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또는 '이 글을 써서 월세는 마련할 수 있을까?'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확실성이란 바로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있는 불확실성이다.
에세이를 쓰는 직업을 생각해보자. 만 개의 가능성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보이지도 개념화되지도 않은 만 개의 가능성 중에서 처음 포착된 걸 놓치면 안 된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른 채 어떤 실을 잡아당기고, 어떤 실을 그대로 두어야 할까? 이러한 과정에서 무슨 아이디어를 골라내 다듬고 주물러서, 이름도 모르는 독자 앞에 내놓아야 할까?
하나의 문장 다음에는 어떤 문장이 오는 것이 가장 나은 것인지, 심지어 어떤 단어가 가장 적합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리한 관찰자라면 내가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오랜 특권이다. 작가는 작가의 고유성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이런 불평을 토로해왔다. 글쓰기에 대해 불평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누가 글을 쓰려고 했겠는가?
오늘날에는 '챗GPT' 또는 '바드'처럼 그 이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캐주얼하거나 신화적인 언어 엔진이 등장했다. 이 언어 엔진은 작가들이 겪는 불확실성으로 인한 고통을 추호도 겪지 않는다.
요청만 하면 몇 초 만에 사용설명서와 단편 소설, 대학교 에세이, 소네트(유럽에서 형성된 정형시의 한 종류로 관련된 형식적 규율들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였으나, 당시에는 14행의 시 형식이 유행했다), 시나리오, 선전물, 논평 등을 쏟아낸다. 가히 '구토 행위'라 할 만하다.
나오미 S 배런이 '누가 이 글을 썼을까?'(Who Wrote This?)라는 저서에 썼듯, 한 장 분량의 글이 문법을 고뇌하는 인간의 작품인지 아니면 기계의 마찰 없는 내면에서 온 것인지를 독자가 항상 분별해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글 읽기의 운명을 주제로 수십 년째 글을 써온 언어학자 배런은 바로 이런 점이 불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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