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내 나이 85세…약 사러 한 시간 버스 타고 갑니다"

머니투데이 남원(전북)=하수민 기자 | 2024.06.19 05:35

[창간기획]전국 16%가 무약촌 ② - KTX도 정차하는 '무약촌' 방문해보니

편집자주 | 인구 10만명당 약국 수 41개. OECD 평균(29개) 대비 1.4배에 달한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약국 접근성이 좋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단순히 인구수를 기준으로 약국 수를 분석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단위를 반영하지 못한다. 인구대비 약국수는 충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장논리에 따라 대부분 인구가 많은 곳에 병원과 약국이 몰리는 탓이다. 소멸위기에 처한 지방 같은 경우는 해열제, 소화제와 같은 최소한의 안전상비의약품을 사기 위해서도 한시간 이상을 나가야한다. 머니투데이가 처음으로 행정동 단위로 공공심야약국과 안전상비약 판매 편의점 분포 현황을 분석했다.

전남 남원시 덕과면에 거주하는 김복순씨(85)가 타온 일주일치 약. /사진=하수민기자

전북 남원시 덕과면에 거주하는 김복순씨(85)는 일주일에 한 번 약국에 방문해 약을 타온다. 집에서 약국에 가기 위해 소요되는 버스 시간만 약 50분.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오는 버스를 타고 하루 중 최소 2~3시간을 투자해야 약을 타올 수 있다. 김씨는 "이곳저곳이 아파서 병원이랑 약국을 일주일에 한 번은 가야 한다"며 "차가 있으면 약국에 가기 좀 편하지만 늙어서 운전도 못 하고 모든 게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10일 기자가 직접 찾은 전북 남원시는 KTX가 정차하는 주요 지방 도시로 꼽힌다. '2024년 대한민국 지속 가능한 도시 평가 결과'에 따르면
전북 남원시는 국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로 약 20㎞를 달려 남원 시청 인근 시내를 벗어나면 거주 인구 10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마을들이 등장한다. 이곳은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약국이 하나도 없는 이른바 '무약촌(無藥村)'이기도 하다.

덕과면도 남원시에 있는 무약촌 중 하나다.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김씨는 한 달 전에 걸린 감기를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김씨의 집안에는 이날 오전에 타온 일주일 치 약 세봉지가 놓여있었다. 봉지를 풀어보니 감기약부터 위산과다 분비 방지약 등이 방바닥을 가득 채웠다.
무약촌 주민의 약국 방문 동선/그래픽=윤선정

김씨는 덕과면 행정복지센터 인근 보건지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진료를 받고 약을 탈 수 있지만 개인 질환을 위해 먹는 약을 따로 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한다. 김씨는 "나이를 먹으니까 버스 시간도 자꾸 까먹어서 놓칠 때가 많다"면서 "오전에 차를 놓치면 그날은 그냥 못 가는 날이다. 그런데도 아프니까 약국 가서 약을 타올 수 밖에 없다. 늙으면 가야 한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덕과면 옆 동네인 보절면에 거주하고 있는 방공자씨(87)도 비슷한 상황이다. 방씨는 이틀에 한 번꼴로 시내에 나가 병원을 찾는다. 오랜 시간 농사를 지으면서 생긴 손목 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약국도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이상 방문해 진통제와 소염제 등 다양한 약을 받아온다.

방씨가 사는 보절면에서 시내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이날도 방씨는 약국에 나갈 계획이었지만 12시 30분 버스를 놓치면서 병원과 약국 방문을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방씨는 "오후에 버스를 타고 가면 돌아오는 길이 너무 빠듯하다"며 "버스 탈 때는 전동차를 들고 타지 못해서 거동이 빠르지 않다. 시간의 여유를 두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남원시내버스 시간표. 남원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7시 20분부터 매 시간마다 한번씩 하루에 단 14만 정차한다. /사진=하수민기자

방씨에게는 상비약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 겨울 함께 마을회관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나선 동네 주민이 멀리서 전동차를 탄채 가만히 멈춰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당 주민은 저녁을 먹은 뒤 급체해 전동차 위에서 그대로 쓰러져 있었으며 그를 발견한 방씨와 주민들은 급히 위장약을 먹이고 구급차를 불러 이송시켰다. 방씨는 "간호사인 딸이 미리 챙겨준 위장약이 있어서 다행이었다"면서 "추운 겨울이라 조금만 늦게 발견했다면 큰일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COVID-19)가 확산한 당시에는 상비약을 구비하기 위해 약국에 방문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계속 몸살이 낫지 않는 이들을 위해 마을 이장이 수요 조사를 한 뒤 상비약을 대신 구매해주는 일도 있었다. 마을 주민 소모씨(60)는 "병원이나 약국이 가까운 거리에 없다 보니까 상비약을 늘 집에 구비해두고 있다"면서도 "코로나19 걸리고 난 뒤 몸살이 계속됐는데 구비해두던 상비약도 다 떨어져서 이장님이 대신 약을 구매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의료 격차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면읍차원에서 보건지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다. 의료 파업으로 의료진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두 명이던 공보의가 한 명으로 줄었다. 그마저도 한 공보의가 세 지역을 나눠 맡게 되면서 최근에는 일주일에 하루에서 이틀 오전 또는 오후 진료만 볼 수 있게 됐다.

보절면 보건소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관계자는 "일주일에 한 번 오후에만 진료가 가능하다고 공지해도 기억을 못 하고 다시 돌아가는 어르신들도 많다"면서 "간호사 혼자서 처방을 못 하기 때문에 가까운 의료원으로 안내하거나 시내에 나가야 한다고 안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보절면 보건지소 직원 책상 달력. 매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6시만 진료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사진=하수민기자

☞[머니투데이 창간기획] 전국 16%가 무약촌 연재 순서

①의사만 부족한게 아니다…전국 16%는 약 살 곳 없는 '무약촌'
②[르포]"내 나이 85세…약 사러 한 시간 버스 타고 갑니다"
③전국 최고령 동네 10곳, 한밤중 약 살데 없는 '무약촌
④[르포]1시간 만에 타이레놀 700정을 샀다...상비약 '복약지도' 무색
⑤안전상비약 확대 반대하는 약사회, 왜?
⑥'13개→11개' 거꾸로 가는 안전상비의약품, 못 늘리나 안 늘리나
⑦ '24시간 운영' 제한만 풀어도 1.2만개 편의점에 '약'들어간다
⑧[르포]"30년째 문제없는데"…한국 편의점 상비약, 일본 1%에도 못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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