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진다☆' 월드컵 4강 신화 첫단추 채웠다[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김소연 기자 | 2024.06.04 06:00
2002년 6월4일, 2002 한일월드컵 D조 1차전 한국 대 폴란드전이 진행됐다./사진=KBS 캡처
"짝짝 짝짝짝! 대~한민국!"

한국 축구가 가장 빛났던 시절, 전설로 기록된 한국 월드컵 4강 신화가 바로 22년 전 오늘 시작됐다.

2002년 6월4일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폴란드와 맞붙어 첫 승전보를 올린 기념비적인 날이다.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48년 만에 거둔 승리의 맛을 바탕으로 한국 축구 대표팀은 전례 없는 드라마를 써 갔다.

'한국 축구 역사는 2002년 월드컵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2002년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최정점이자, 이후 한국 축구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벤트였다.

당시 한국 축구 선수들의 활약상이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졌다. 현재 한국 축구계를 이끄는 '월드 클래스' 선수들을 키운 것도 2002년 월드컵이다. 한국 대표팀 주장인 손흥민 선수를 비롯해 기성용, 이청용, 구자철, 황희찬 선수가 2002년 월드컵을 보고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운 대표적인 '월드컵 키즈'로 꼽힌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로고/사진=대한축구협회 캡처


22년 전 그날, 신화의 시작



"삑~". 2002년 6월 4일 오후 8시 30분,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에서 한·일 월드컵 D조 대한민국과 폴란드의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드넓은 경기장에 들어찬 5만여명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응원단 '붉은 악마'의 함성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열띤 응원 기세와 달리, 경기 초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시 한국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거둔 적이 없는 데다, 상대는 유럽의 강호 '폴란드'였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2002년 월드컵 유럽 예선을 1위로 통과할 만큼 강팀이었다.

지금에서야 길이 남을 명장으로 통하지만, 당시 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도 앞선 경기들에서 부진한 성과로 수세에 몰리기도 했었다. 대표팀은 월드컵 직전 잉글랜드, 프랑스, 스코틀랜드 등 강호와 평가전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반전의 징조를 보였지만, 본선 무대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였다.

경기 초반, 폴란드가 날카로운 공격을 선보이며 경기 주도권을 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주장 홍명보는 기죽지 않고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날리며 기회를 한국으로 가져왔다.

분위기를 탄 대한민국 대표팀은 전반 25분, 이을용이 황선홍에게 크로스를 올려준 것을 황선홍이 깔끔하게 왼발 발리슛으로 연결하면서 선제골을 획득했다.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상태로 맞이한 후반전 8분, 역사에 길이 남을 유상철의 쐐기골이 폭발했다. 특유의 시원한 중거리 슛으로 유럽 강호 폴란드를 상대로 '2대 0' 승리를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승리 쐐기골을 넣은 직후 고 유상철 선수의 모습/사진=유튜브 갈무리

유상철은 폴란드전 중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도 선수 교체를 하지 않은 채 경기를 뛰면서 투혼을 발휘했다.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고, 한국의 2002년 축구 신화가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지금도 2002년 월드컵 명장면으로 유상철의 폴란드전 결승골을 꼽는 이들이 많을 정도다.



2002년 한일월드컵, 그중에서도 폴란드전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첫 본선에 진출했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4무 10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조별리그 탈락은 물론, 본선에 진출해서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이 같은 흐름은 폴란드전을 계기로 달라졌다. 폴란드전은 경기 결과뿐만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상대를 압도한 경기로 평가받았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들/사진=유튜브 갈무리
폴란드전을 시작으로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은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에서 1대0으로 승리를 거두고 이후 16강전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대상으로 2대1 승리를 거두는 기적을 이어갔다.

이어진 8강전 '무적함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는 치열한 접전 끝에 승부차기에서 5대3으로 승리를 거두는 드라마를 썼다.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1대0으로 패하긴 했지만, 한국 축구 대표팀이 2002년 월드컵에서 선보인 경기들은 이후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신화가 됐다.

이 모든 기적이 폴란드전에서 시작됐다. 기념비적인 폴란드전 결승 골을 넣은 유상철 선수는 이후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2021년 6월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많은 축구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달라진 한국 축구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월드컵이자, 한국 최초의 홈 경기로 치러진 2002 한일월드컵은 우리나라 축구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거둔 최종 성적표는 4위. 브라질이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독일이 준우승, 그리고 터키에 이어 대한민국이 4위였다.
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월드컵 응원 인파/사진=유튜브 갈무리

홈 경기의 이점을 바탕으로 펄펄 날아다닌 한국 축구 선수들에, 열광적인 응원 문화까지.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전 세계가 '다이나믹 코리아'를 주목하게 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이 핵심선수로 중용한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과 같은 축구 인재들이 한국 축구의 주축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축구 인프라와 응원 문화도 달라졌다.

2002년의 영광을 바탕으로 축구 꿈나무들을 위한 축구 전용 구장과 잔디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물론, 선수 조기 유학, 프로 선수들의 다양한 해외팀 진출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BE THE RED' 티셔츠/사진=X 갈무리
"오, 필승 코리아",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등 '붉은 악마'로 대표되는 거리 응원 문화는 오천만 국민을 하나로 묶는 기제가 됐다. 누구나 붉은색 티셔츠만 있으면 하나가 돼 부둥켜안고 응원했다.

축구가 이긴 날이면 호프집 사장님들이 골든 벨을 울렸고, 도로를 점유한 시민들이 새벽까지 응원가를 불렀다. '엇박자 박수'를 흉내 낸 자동차 경적이 울리면 누구나 손을 들고 응원을 시작했다. 이 자발적 응원문화가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 시위 문화'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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