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도 꺾지 못한 신념…차별과 싸운 '전설의 복서' 하늘로 [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박상혁 기자 | 2024.06.03 05:30

편집자주 |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무하마드 알리가 2016년 6월3일 사망한 뒤 사람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고 있다./사진=BBC

2016년6월3일. 복싱계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가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사인은 파킨슨병의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 그의 나이 74세였다.

알리의 사망에 전 세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조지 포먼, 마이크 타이슨, 플로이드 메이웨더, 매니 파키아오 등 복싱계 스타들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

프로 통산전적 56승(37KO) 0무 5패. 복싱 헤비급 챔피언 3회.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저 '복싱을 잘했던 선수'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당시 시대상을 비춰볼 때, 링 밖에서 그가 보인 흑인 인권운동가, 외교관, 그리고 사회 복지사로서의 행보는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 4년 만에 세계 챔피언…승승장구하던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가 1964년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소니 리스턴을 이기고 포효하고 있다./사진=Sports Illustrated 캡쳐

18살에 아마추어 복서로 시작한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참가해 복싱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해 헤비급으로 증량해 프로 데뷔한 그는 무패행진을 이어가 무서운 신예로 거듭난다.

어느덧 데뷔 후 4차가 된 1964년. 그는 챔피언 벨트를 두고 당시 세계 최강이던 소니 리스턴과 타이틀전에서 맞붙었다. 전문가 대부분은 갓 데뷔한 신예 선수가 고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모두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특유의 현란한 풋워크와 가벼운 몸놀림으로 리스턴의 공격을 피하고 펀치로 압도했다. 경기를 주도하더니 급기야 7라운드에 기권승을 따내 챔피언 벨트를 손에 쥐었다. 그의 말대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았다.

하지만 그가 챔피언이 됐다는 소식보다 경기 후 인터뷰 내용이 더 화제였다. 그는 자신이 이슬람교(수니파)로 개종했고, 이름을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고 밝혔다. 당시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맬컴 엑스의 '네이션 오브 이슬람' 운동에 감화됐다고.

1960년대 미국은 흑백 분리 정책으로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기로, 마틴 루서 킹 목사, 맬컴 엑스 등 흑인 인권 운동가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 중 맬컴 엑스가 몸담고 있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흑인들을 탄압하는 백인들을 적대시하고, 이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는 흑인 민족주의 단체였다. 이 단체는 백인들의 주류 종교인 기독교는 적이고, 흑인들을 위한 종교는 이슬람교라고 했다.

새 이름을 '장착(?)한' 무하마드 알리는 1965년 리스턴과의 2차전에도 승리해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다. 이후에도 플로이드 패터슨, 브라이언 런던 등 쟁쟁했던 상대로 연승을 기록해 승승장구한다.


'그들은 나를 흑인이라고 무시하지 않아'…베트남전 징집 거부한 알리


무하마드 알리가 1974년 32살의 나이로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조지 포먼을 상대하고 있다./사진=Britannica

세계 챔피언 알리에게 시련이 닥친 건 1967년 때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당시, 징집 대상자 기준이 낮아져 해당 사항이 없던 그에게도 징집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온 것이다.

하지만 무하마드 알리는 국방의 의무를 거부했다. 그는 '베트콩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무시한 적이 없는데 왜 지구 반대편의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나?'라는 말을 남기고.


1심에서 유죄 판결받은 그는 챔피언 벨트와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주류 언론은 그를 사회적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그가 미국 사회를 향해 내뱉은 고함은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줬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흑인 인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3년이 지난 1970년. 우여곡절 끝에 그는 2심에서 무죄 판결받았다. 링 위에 복귀한 시점도 이때다.

공백기 동안 노쇠해진 그는 1974년 10월 잃어버린 챔피언 벨트를 놓고 한창 주가를 날리던 20대 조지 포먼과 역사적인 복싱 대결을 펼친다. 당시 알리의 나이는 32살. 이번에도 전문가 대부분은 조지 포먼의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변이 일어났다. 난투극 끝에 알리가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8라운드에 승리한 것. 이 경기로 그는 영웅이 됐고, 백악관에도 초청받았다. 역경을 딛고 일어나 챔피언 자리를 재탈환한 순간이었다.

이후 알리는 하락세를 겪었다. 1980년 레리 홈즈에 패배했고, 이후 패배를 거듭한 그는 1981년 공식 은퇴했다.


은퇴 후 파킨슨병…링 밖에선 선한 영향력


무하마드 알리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최종 성화 봉송자로 불을 붙이고 있다./사진=The Newyork Times

1984년. 알리가 은퇴한 지 3년이 지난 시점. 몸을 비정상적으로 덜덜 떨며 대중 앞에 나선 그는 자신이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파킨슨병은 운동 느림, 안정 시 떨림, 근육 강직 등의 증상을 보이는 운동장애다.

하지만 알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활발하게 사회 활동에 나섰다. 그는 TV쇼나 강연 등에 출연해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미국의 공립 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 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니는 등 사회 복지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민간 외교관으로서 평화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고, 1990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만나 미국 포로 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6년엔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최종 점화자로 등장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스포츠 선수로는 처음으로 '역대 최고(The Greatest of All Time, GOAT)'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GOAT는 스포츠 선수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찬사로, 특정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만 붙여지는 칭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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