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매국 물러가라" 1만2천 대학생, 서울 거리로 뛰쳐나왔다[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양성희 기자 | 2024.06.03 06:16

1964년 6월3일 6·3항쟁

편집자주 |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 정상화 움직임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온 모습./사진 출처=한국정책방송원 정부기록사진집

60년 전 오늘, 1964년 6월3일. 서울대생을 중심으로 한 1만 여명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 정상화 움직임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반대 시위는 6월3일 절정에 달했기에 '6·3항쟁'으로 불린다. 이 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극렬한 반대 움직임에도 결과적으로 이듬해 한일협정이 맺어져 양국 외교가 정상화됐다.



한일국교 정상화 추진,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과 손을 잡으려 했던 건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속도감 있게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경제건설을 구상한 그는 부족한 자금을 협상을 통해 조달하려 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 진출을 검토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미국은 안정적으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통합전략을 짰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등을 끌어들여 지역통합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관계 정상화가 먼저였다.

박정희 정부는 중단됐던 한일회담을 재개했고 물밑에서 협상을 이어오다가 1964년 3월 대외적으로 한일협상 스케줄을 발표했다.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 정상화 움직임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경찰, 군과 대치 중인 모습./사진 출처=한국정책방송원 정부기록사진집



"제2의 경술국치", "피의 투쟁"…극렬한 반대 시위


그러자 야당을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대일외교굴욕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주축이 됐다.

이들은 한일회담을 '매국외교'라고 봤다. 일본 자본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면 일본에 종속될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일본의 경제 식민지화를 우려한 것이다.

시민들의 정서도 비슷했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었거나 부모세대가 이 시기를 지났기에 한일국교 정상화 움직임에 대해 "왜놈과 국교 정상화는 제2의 경술국치"라며 반발했다.

반대 시위는 대학 캠퍼스로 번지면서 본격화했다. 3월24일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의 각 대학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다음날 전국으로 확산됐다. 대학생들은 정부의 움직임을 "친일 매국 행위"라고 꼬집었다.


그런 가운데 시위를 격화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5월21일 완전 무장한 8명의 군인과 2명의 민간인이 법원에 난입해 시위 학생의 영장을 기각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소란을 피우고 영장 담당 판사를 협박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서울대에서는 5월30일 단식농성이 이뤄졌고 공포정치에 반발한 학생들은 하나둘 거리로 뛰쳐나왔다. 단식농성에 돌입한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 전 의원은 "오늘의 단식 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 모른다"고 했다.



절정을 맞은 시위…비상계엄 선포, 348명 구속


6월이 되면서 시위는 절정을 맞았다. 6월2일엔 서울대, 고려대 학생 3000여명이 "주관적인 애국충정은 객관적인 망국행위"라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를 경찰이 제지하면서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정점을 찍은 건 6월3일이었다. 이날 서울 시내 1만2000여명의 대학생들은 도심으로 나와 경찰과 유혈 충돌을 불사했다.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대생들도 서울로 향했고 대전, 청주 등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정부는 강경대책을 논의한 끝에 급기야 이날 밤 9시40분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시위 금지, 언론 검열, 전교 휴교 등이 발표됐다. 또 영장 없이 압수수색과 체포, 구금 등 신병 확보가 가능할 수 있도록 했다.

비상계엄은 7월29일 해제됐다. 55일간 구속된 대학생은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으로 모두 348명에 달했다. 이후 기소된 구속 피의자는 172명, 불구속 피의자는 50명이었다.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된 사람은 1120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엔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있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재오 전 의원과 고등학생이었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도 이에 연루돼 6개월간 복역했다.



반대 시위에도 한일국교 정상화


결과적으로 한일협상은 성사됐고 광복 20년 만인 1965년 한일국교는 정상화됐다.

항쟁의 표면적인 결과는 실패였지만 해방 19년 만에 우리 국민의 반일 감정이 전면에 드러나는 계기가 됐고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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