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율 88%↓' 기적…도로에 분홍색 칠하자 벌어진 일[아·시·발]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 2024.05.14 07:00

[인터뷰] '노면색깔유도선' 국내 첫 발명·설치한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55)
고민 시작한 지 3년, 딸·아들 그림 그리는 것 보다가 "이거다" 유레카
자칫하다 실패시 지우려면 1억원이라 걱정도 많아
"야, 그래, 칠하면 되겠다" 불안 견디며 아이디어 받아준 이들 있었다

편집자주 | 기발한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아이디어의 시작과 발명, 이른바 '아시발'입니다. 시발(始發)은 비속어가 아니라 '처음으로 일어남'이란 뜻입니다. 세상을 선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더 널리 퍼지길 바랍니다.

기존에 없던 걸 만드는 건 두려운 일이다. 잘못하면 책임을 오롯이 다 져야하기 때문에.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은, 고속도로 분기점 사고를 막기 위해 길 위에 초록색, 분홍색을 칠했다. 설치 뒤 6개월간 사고는 단 3건 발생했다. 3년의 고민 끝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 그걸 알아봐주고 받아들여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고속도로 위에서 한 남성이 숨졌다. 2011년 3월 저녁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 안산 분기점에서였다. 화물차는 왼쪽(강릉 방향)으로, 승용차는 오른쪽(목포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차선 변경을 해야 했다.

별수 없이 두 차가 맞물리는 상황이었다. 서로 끼지 못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별안간 장애물이 나왔다. 승용차는 그걸 보고 빠졌는데, 화물차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물차가 그대로 충돌했다.

사망 사고. 실은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2011년 당시 군포지사)이 계속해서 우려했던 거였다. 때는 2009년. 경기도 동탄에 있는 인재개발원에서 교육받고 회사로 복귀하던 길. 윤 차장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둔대 분기점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지난 2009년, 양재 IC에서 발생한 추돌 사고 현장./사진=뉴시스
"아차, 했는데 고속도로에선 후진도 못 하잖아요. 멍청이처럼 목포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고요. 도로 설계도 했고, 건설도 했고, 유지 관리도 하는 사람도 길을 놓치는데, 국민들은 오죽할까 싶었어요."

그로부터 2년 동안 해결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사망 사고까지 난 거였다.



8살 딸, 4살 아들이…스케치북에 색칠하는 걸 보고 '유레카' 외쳐


자녀들이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는 걸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 고속도로에 색칠을 해 유도선을 그리면 헷갈리지 않겠다고. 오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그 평범한 장면에서 스파크가 튄 거였다./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당시 기아무개 한국도로공사 군포지사장이, 안산 분기점 사고 CCTV를 보며 말했다. 도로 담당자인 윤 차장이 함께 있었다.

"저 모양을 한 번 봐봐. 저긴 항상 사고가 많이 나던 곳인데, 저렇게 두면 안 되지. 해결책을 만들어야지.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을 듣고 윤 차장에게 오기가 생겼다. 저도 모르게 이리 대꾸했다.

"예, 알겠습니다. 해결 방법을 찾아 오면 될 것 아닙니까."

자신만만했던 것과 달리 돌아서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묵직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당시 8살이었던 딸내미와 4살이었던 아들내미가 거실에 있었다. 평상시엔 주로 방에 있던 애들이었다. 그날따라 거실 바닥에 스케치북을 놓고 물감으로 색칠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색깔 유도선에 영감을 준 윤석덕 차장의 두 자녀./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그걸 보다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애들이 동그라미, 엑스 이런 걸 칠하고 있었거든요. 선들이 지나가는 걸 보니까 복잡함 속에 단순함이 있는 거예요. 아, 도로에 저렇게 그리면 되겠는데. 머릿속에 촘촘했던, 복잡한 거미줄이 스르르 걷히는 느낌이었어요. '유레카(뜻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말)'였지요."

그러고 보니 대학교 때 봤던 광경도 있었다. 5월에 축제할 때, 지하철역부터 학과 주점까지 길에 붙이던 발바닥. '선배님, 이 길만 따라오세요' 했듯이. 그걸 따라 선배들은 잘 찾아왔었다.



"도로에 색칠? 나라면 안 할 거예요" 반대가 수두룩했다


'길치들의 구원자'라 불리며 노면 색깔 유도선을 만든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사진=남형도 기자
'고속도로에 색깔을 길게 칠해, 차들이 따라가게 한다. 길을 잃지 않고 우왕좌왕을 피하게 해 사고를 줄인다.'

위법이었다. 도로에 칠할 수 있는 색이 오직 4가지뿐이었기에. 기본색인 흰색, 중앙분리선인 노란색, 버스전용차로인 파란색, 규제 등에 쓰이는 빨간색. 그 외 색깔을 칠하는 건 도로교통법 위반이었다.

주변 의견도 좋지 않았다. 윤 차장의 물음에 한 기술사가 답했다.

"도로에 색칠하면 운전자에게 혼선을 줄 뿐이죠. 그로 인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잖아요. 그럼 만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데요. 내가 윤 차장님이라면 안 할 거예요. 그런 위험을 왜 감수하세요?"

또 다른 교통 전문가는 이리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우겨서 색칠했다고 칩시다. 그걸 따라가다 사망 사고가 났다고 하면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이거 법에 없는 건데 임의로 했다'며 손해 배상을 청구할 거 아니에요. 책임질 수 있겠어요?"



"야, 그래, 칠하면 되겠다" 믿어준 이들이 있었다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찍은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아침 8시. 윤 차장은 기 지사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 지사장이 아직 출근하기도 전이었다. 서 있던 윤 차장을 보며 지사장은 "얼마나 급하면 그 앞에 서 있냐. 그래, 들어보자"고 했다. 윤 차장이 보고했다.

"지사장님, 저 색칠하려고요."(윤 차장)

"뭐? 색칠?"(기 지사장)

윤 차장은 서류 뭉치가 날아올 수도 있겠다 각오했었다. 그런데 대답이 이랬다.

"그래, 칠하면 되겠다, 야."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그런 얘기도 나눴다. 롤러로 색칠하는데 3000만원, 지우는 데엔 1억원이 든다고. 기 지사장은 두려워하는 윤 차장에게 그런 말까지 했다. "야, 일단 하면 너랑 나랑 반땅이다. 5000만원씩 내면 되잖아." 그 말을 듣고 맘이 나아졌단다.

그리고는 어떤 색을 칠할지 고민했다. 덜 튀면서 잘 유도할 수 있는 색. 먼저 떠올린 건 초록색이었다. 그리고 분홍색을 하고 싶은데 걱정이었다. 또라이라는 이야기를 들을까 싶었다고. 그런데 분홍색에 계속 집착하게 됐단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시설물 유지 관리하는 현장 담당 손선조 소장과도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소장님, 제 고민 한 번 들어주세요. 제가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처음 안을 넣었는데요. 주황색은 중앙분리대 의미가 강해서, 운전자분들이 더 힘들어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분홍색을 넣고 싶은데 미친X 소리 들을까 봐 못 하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윤 차장)


"어차피 초록색도 튀거든요. 이미 튀는데 분홍색이면 어때요. 튀려면 아예 튀세요. 저는 찬성입니다."(손 소장)



"지금 얘기지만, 2~3년은 가슴 졸였어요"…최초 승인해준 임용훈 경찰관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승인해준, 임용훈 당시 인천고속도로 순찰대 경감(현재 인천 미추홀경찰서 석암파출소장)./사진=임용훈 소장 제공
이제 경찰(고속도로 순찰대) 승인만 받으면 되었다. 당시 인천고속도로 순찰대 담당은 임용훈 경감(현재는 인천 미추홀경찰서 석암파출소장)이었다. 이 얘기는 임 경감에게 직접 들어봤다.

"나들목 구간에서 지리가 미숙해서 나는 사고가 정말 잦았어요.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아이디어 듣고 '아, 이거 정말 좋은데' 느낌이 들었죠. 그런데 법령이 없어서 하게 되면 불법 시설물이 되는 거라 고민이 되더라고요."

징계를 감수하고 해야 하는 거였다. 오로지 믿은 건 '적극행정 면책 제도'였다. 열심히, 또 소신껏 하려 했다면 면책해주는 제도. 그게 생각났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고를 정말 줄이고 싶었다고.

분기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사진=뉴시스
"그래요, 설령 징계 책임을 묻더라도 합시다, 그렇게 시작됐지요. 면책 제도 믿고 간 거예요(웃음)."

임 경감 역시 당시 지구대장을 어렵사리 설득했다. 마침내 승인이 떨어졌다.

그러고도 2~3년은 가슴을 졸였단다. 잘못되어서 역효과가 나면 어떡하나 싶어서. 사고가 줄어드는 걸 보고,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고.

"가끔 고속도로 경찰 하다 보면 동료들이 그래요. 색깔 유도선 저거, 누구 아이디어인지 참 잘했어. 그래서 '내 지분도 상당히 있어' 하면 안 믿어요(웃음). 뿌듯함을 느낍니다."



연말까지 '사고 88% 감소'…"포상 받아 삼겹살 쐈지요"


2011년 5월, 안산 분기점에 처음 색깔 유도선이 설치된 모습./사진=네이버 지도
2011년 5월 3일이었다. 사망 사고가 났던 바로 그 안산 분기점에, 국내 최초로 도로 노면 색깔 유도선이 설치될 참이었다.

출근 시간 지나고 아침 10시부터 칠이 시작됐다. 전화통이 난리가 났다.

"길 막히는 데에서 왜 일일이 롤러로 수작업하느냐, 이상한 색깔을 왜 도로에 칠하느냐, 너 뭐 하는 XX냐, 종일 전화가 왔어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지요. 차선 도색하는 소장님도 전화 와서 '나 이제 더는 못 하겠다'고 했고요."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그런 그를 윤 차장이 다시 설득했다. "저도 욕 많이 먹고 배가 부른데요. 욕먹은 김에 우리 그냥 계속해요. 실컷 먹읍시다." 그리 오후 3시까지 작업이 계속돼 마무리되었다.

다 그려진 걸 보고 윤 차장은 생각했다. '내가 이거 뭔 짓을 한 걸까. 효과가 있을까.' 다음 날엔 차를 타고 운전자 입장에서 가보았다. 생각보단 괜찮네 싶었다. 앞차들도 관찰했다. 인천 갈 사람은 분홍색으로, 강릉 갈 사람은 초록색으로 나누어졌다. 차 막히는 것도, 싸움도 줄어드는 게 보였다.
/사진=국토교통부
안산 분기점 사고는 연간 평균 25건이었다. 노면 색깔 유도선이 설치된 5월부터 12월 말까지 사고는 단 3건이었다. 설치 후 6개월 동안 사고가 88% 줄었단다. 이후 전국에 확산되었고, 색깔 유도선 설치 전후 사고 발생이 27% 줄어들었다고. 서울시 교차로 기준으론 2016년 대비 2017년에 50% 줄었다(국토교통부 통계).

색깔 유도선은 지난해 3월 기준 전국 고속도로만 따져도 905곳에 적용될 만큼 늘었다. 2021년 5월엔 도로교통법에 반영돼 법적 근거도 갖췄다.



13년 만에 '국민훈장'…"평소 SF소설 좋아해, 아이디어 내는 것 즐겨"


색깔 유도선을 발명한지 13년 만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그리고 함께 자리한 그의 아내./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 윤 차장은 한국도로공사 청송지사에 있었다. 현장 소장이 그에게 말했다.

"초록색, 분홍색 도로에 칠한 유도선 있잖아요. 천재적인 발상이 궁금하더라고요. 혹시 누가 했는지 아세요?"

윤 차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윤 차장은 올해 5월 행정안전부 '정부 혁신 유공시상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2011년 5월에 설치한 지 13년 만이었다. 김상호 행안부 혁신기획과 사무관은 "도로 노면 색깔유도선이 만든 사람도, 성과도 뚜렷한데 유퀴즈 방송 출연 이후 무슨 상을 받았다던가 그런 게 없어서, 연말에 유공자 포상 추천을 하기로 된 것"이라고 했다. 관련 기사에 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제공
'안산 분기점이 서서울 톨게이트 지나자마자 한꺼번에 목포, 강릉, 인천 방향 세 갈래로 갈라졌어요. 색깔 유도선 없을 땐 주말에 지나갈 때마다 사고 차 두어 대씩 꼭 있었는데, 이젠 거의 없어졌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개미, 제3인류 등)을 즐겨 읽는단 사람. 이리저리 아이디어를 궁리하는 사람. 다음엔 도로의 암살자라 불리는 '블랙 아이스'를 해결할 거란 사람. 이어 윤 차장이 읽었단 총·균·쇠(제러드 다이아몬드 저)라는 책 속 이야기로 이어졌다.
"총·균·쇠 책에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다'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잘못 봤나 싶었죠.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인 것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데 자동차도 그렇잖아요. 그 당시엔 마차랑 말이 있는데 자동차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누가 만들었어요. 그게 있으니까 다들 타고 다니잖아요. 색깔 유도선도 아무 쓸모 없다고 생각했는데 만드니 잘 쓰시는 거지요."

용기를 북돋는 말을 덧붙였다. 어디선가 쓸모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를 부단히 내는 이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으면 언젠가 쓰임새가 생깁니다. 빛을 볼 날이 올 거예요. 중간에 멈추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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