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지루한 통화로 불렸던 엔화가 가장 투기적인 통화가 됐다. 달러당 160까지 곤두박질친 엔화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세계 5대 기축통화로서의 입지가 위협받는 수준이다. 시장에선 엔화 급락이 단기 현상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미-일 금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한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다.
1일 블룸버그통신은 일본은행이 공표한 당좌예금 잔고를 토대로 "일본 관리들이 지난달 29일 엔화를 지지하기 위해 5조5000억엔(약 48조3500억원)을 썼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골든위크 연휴였던 29일 오전 엔화는 34년 만에 최저치를 찍었고 저항선으로 여겨진 155와 158선이 '저항 없이' 뚫렸다. 그러다 정오가 되자 엔화가치는 급격히 'U턴'해 불과 몇 분 만에 달러 대비 3% 가까이 강세를 보였는데 이 때문에 일본 정부가 개입했다는 추측이 시장에 퍼졌다.
이날 엔화 급락에는 같은 달 26일 일본은행의 금리 동결이 크게 작용했다. 휴일이라 거래 자체도 평소 대비 많지 않았는데 투기성 매도가 가세하자 변동폭이 확대됐다.
그러나 시장 관계자들은 엔화 약세가 일시적 현상이 아닐 수 있다고 경고한다. 500bp(베이시스 포인트, 100분의 1%)까지 벌어져있는 미-일 금리 차이를 감안한 구조적 현상이란 지적이다. 구마노 히데오 다이이치생명연구소 이코노미스트(전직 일본은행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엔화 약세는 아마도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 것"이라며 "일본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엔화는 달러, 유로 등과 함께 글로벌 5대 기축통화다. 글로벌 무역에서 실제 엔화의 결제비중은 3% 미만으로 크지 않지만 투기 세력의 타깃이 되고 가격이 들쑥날쑥해지면 기축통화로서의 신뢰를 잃게 된다.
엔화 가치 안정의 열쇠는 결국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행보에 달려있다.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다. 미국 경제가 생각보다 견실하다 보니 미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의 금리 인하 시기가 늦춰지고 있다. 연준이 당장 금리를 낮춘들 일본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50%에 달해 섣불리 금리 차이를 좁히기도 어렵다. 이 같은 구조적 상황은 투기 세력의 베팅을 부추길 수 있다.
엔화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10% 이상 하락, 전 세계 주요 통화 중 최악의 성적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급격한 엔화 약세는 무역 불균형과 함께 다른 아시아국가들의 통화가치까지 동반 추락시킬 수 있다.
일본 정부의 개입이 엔화 약세 추세를 반전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데이터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환율방어 가능성이 점쳐진 지난 4월 23일까지 1주일 동안 글로벌 헤지펀드와 자산운용사들은 엔화 약세에 대한 베팅을 역대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런던 모넥스유럽의 외환분석책임자 시몬 하비는 "투자자들이 가치 저장수단으로서 엔화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정부의 은밀한 개입만으로는 더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은행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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